1989년 10월, 구동독 라이프치히는 7만명의 시위물결로 가득찼다. 경찰의 발포가 다가온 순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연주회장인 게반트하우스의 문을 활짝 열어 시위군중의 피신처가 되게 했다.
이후 공산당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고 권력 공백기가 왔다. 시민 지도자들은 마주어를 동독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마주어는 단호했다.
“내가 했던 일은 임박한 유혈사태를 피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미 나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훌륭한 직업을 갖고 있다.”
만약 그가 동독 정권에 참여했다면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지식인이자 예술가로 ‘온전’할 수 있었을까.
마주어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여권이 새로 창당할 신당 발기인에 지휘자 정명훈(鄭明勳)씨가 포함된 일을 생각해 본다. 정씨가 정치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려고 스스로 참여한 것인지,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 요청했기에 거절하기 힘들어 ‘이름을 빌려 준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본인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친과 국내 순회공연중인 누나 경화(京和)씨는 ‘금시초문’이라며 당황해 하는 모습이다. 상당수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은 세계적 지휘자인 그를 여당이 ‘장식용’으로 끼워 넣었다면 정치와 예술, 어느 분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휘자는 대부분 80대까지 끄덕없이 현역으로 활동한다. 정씨의 예술적 기대수명이 40년이나 남아있는 셈이다. 부침이 잦은 우리 정당사에서 신당의 기대수명은 몇년일까. 군사독재 시절 이후 시인 등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가 정치권에 몸을 담았다가 1회용으로 사라지곤 했다.
유윤종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