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 매듭을 지어 새 천년을 굳이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과 미지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모른다. 특히 우리는 천년 문턱의 언저리에서 경제환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냉엄한 세계 시장논리 속에서 한 국가사회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새삼스레 실감한다.
정신의 황폐화를 담보로 천민자본주의만을 추구해온 우리 사회는 봉건적 선민의식의 책임없는 거대담론에만 휘말려 ‘작은 진실들’의 가치를 등한시해왔다. 우리에게 문제는 늘 자신만은 예외로 한 ‘정직하지 못한 사회’였고 그들만의 ‘삼류정치’였을 뿐이다. ‘나’라는 한 개인이 바로 그러한 사회와 정치를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라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모든 분야에 만연된 뿌리없는 허황함과 욕망의 과잉에 대해 면책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건강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더 클 수 있다는, 그러한 공동선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고통스러운 축제의 현장에 뛰어드는 용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이란 단지 구두선같은 ‘개혁’캠페인으로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더욱 저변에 깔려 있는 ‘문화’의 측면에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 ‘문화’는 인격의 형성과정이 그러하듯 짧은 시간 안에 그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힘들다. 내세우지 않고 진득하게 견디는 힘의 축적이야말로 가장 시급하다.
새 천년의 문턱에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라 하여 선구자를 자처하며 허투루 길을 내어서도 안된다. 뒷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정신문화 영역의 일각을 담당하는 출판인으로서 새 천년을 내딛는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럽다.
조상호(나남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