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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맨]광기와 모순

입력 | 1999-09-13 18:33:00


최근 ‘ANY4U’라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세워 독립한 강호수씨(28·laker@any4u.com). 맥주 한 잔도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 그에게 의사가 “폭탄주를 많이 먹느냐”고 물었다.

강씨는 스타크래프트를 배운지 2시간 만에 배틀넷에서 1승을 거둔 실력의 디지털맨. 샐러리맨 시절 입사 1년 반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밤을 새고 일하다 매일 새벽 5시 사무실의 야전침대에서 취침, 오전 10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휴일 없이 반복한 그의 간은 알콜중독자 수준으로 허약해져 있었다.

의사의 말에 그가 내린 처방은 ‘잠은 꼭 집에서 자기, 내년부터는 건강진단 받지 않기’. 왜? “노는데(그는 일을 ‘놀이’라고 표현한다) 신경 쓰이니까.”

◆중독과 광기

‘아래 위 찍고, 다시 위로 왼쪽 오른쪽….’

신라호텔 홍보실 안재만대리(30·kikey@samsung.co.kr). 요즘 ‘댄스 댄스 레볼루션(DDR·발판의 표시에 맞춰 춤을 추는 일종의 컴퓨터게임)’에 맛을 들인 그에게 보도블럭은 ‘↑↓←→’표시가 찍힌 DDR의 발판으로 보인다.

인도를 걸으며 그는 상상속에서 춤을 춘다. 걷다가 골목이 보이면 머리속에서 스타크래프트의 한 종족인 ‘테란’을 불러낸다.

컴퓨터게임과 현실이 혼재된 삶. 오락과 미디어가 제공하는 시뮬레이션이 실재보다 더 강렬하고 현실적이라고 갈파한 장 보드리야르의 학설을 실감케한다.

안대리는 “DDR과 스타크 중독증세”라고 가볍게 정의한 뒤 “그러나 중독도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고 일에 반영하려면 현상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깨어 있기 때문에 중독된다’는 역설.

전문가들은 디지털 문화의 특성으로 네트워크와 하이퍼텍스트를 꼽는다. 단말기 상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네트워크와 하이퍼텍스트는 사람을 한없이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나 같다”는 식으로 감정이입을 한다면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는 “내가 곧 주인공”이라며 빠져든다. 그러니 광기어린 중독 현상을 보일 수밖에.

◆중독된 피터팬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OKopenmind@netsgo.com)는 “좋아하는 일에 미친듯 빠져드는 디지털맨의 이같은 면은 젊음의 특징인 충동과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피터팬의 모습이라는 설명.

미국의 문화비평가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사람이 문화적으로 진화하게 되면서 ‘유년기’는 더욱 길어진다고 했다. 러시코프가 ‘카오스의 아이들’이라고 명명한 이들은 더 오랫동안 놀기 위해 아이들처럼 살려 한다.

인터넷 철학박사인 라도삼씨(중앙대 신문방송학 강사·kuber21@nownuri.net)는 “아날로그체제하에서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익히면서 사회인이 됐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디지털맨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걸러지지 않은 정보’를 접하고, 온라인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맘에 맞는 친구들과 시간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사귀면서 굳이 절제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다는 것이 라씨의 분석. ‘어른’이 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들을 사회인으로 만드는 ‘권위’는 이제 없다.

◆논리적이면서 감정적?

한솔PCS에서 전자사보를 제작하며 회사 웹사이트를 통한 사이버홍보를 맡고 있는 이옥향대리(29·ojessica@hansol.co.kr). 3년간 다른 직장에 다니다가 “‘원샷’을 제품이름으로 정한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직장을 옮겼다.

PC게임 정보제공업체 ㈜동쪽의땅 임영주대표이사(30·g2am@g2am.co.kr)도 때때로 “그냥 좋아서” 남의 회사의 광고를 무료로 회사 홈페이지에 올려 놓는다. ‘A를 얻으면 반드시 B를 잃게 돼있다’는 게임이론의 신봉자. ‘함께 일할 때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냉정한 스타일이지만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감정에 이끌릴 때가 많다.

미국 ‘뉴패러다임 학습사’의 사장이자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의 저자인 돈탭스콧은 디지털 문화의 특징으로 ‘감성’을 들고 있다.

인터넷은 디지털텍스트 사운드 이미지 동영상을 총망라하는 초강력 매체일뿐 아니라 즉각적으로 느끼고 감지하는 감각적 피드백과 단 한번의 클릭으로 정보의 유용성을 냄새맡는 후각적 판단력까지 필요로 한다. 덕분에 일별만 하고도 속성을 인지, “감 잡았어”하고 외치는 능력은 누구도 디지털맨을 따라갈 수 없다.

◆모순의 여러 얼굴

가치관이 뚜렷하지만 아날로그 세대의 눈에는 ‘철딱서니 없는 듯한’, 좋다 싶으면 미친듯이 몰입하는 디지털맨. 컴퓨터와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문제아’로 낙인 찍혔을 사람들이다.

미국 MIT 심리학과의 쉐리 터클교수는 “윈도우의 멀티태스킹 기능이 첨가되면서 다중인격체 형성이 가속화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생활에서는 동시에 두 인간이 될 수 없으나 가상공간에선 여러개의 ID를 갖고 동시에 여러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디지털맨, 그가 어려 보이는가. 그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다. 그의 머리 속에, 심장에, 그리고 등짝에도 다른 얼굴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이제 세상의 몫이다.

〈나성엽기자〉newsda@donga.com

▼다음편은 '디지털 연인' 입니다▼

최근 PC통신 천리안이 시작한 ‘라이브미팅’(go livemeet)서비스에는 하루 23만명 가량이 접속하고 있다. 정식회원만 8600명. 미팅 신청자 중 선발된 여성 4명이 다수의 남성과 채팅을 나누며 파트너를 ‘찍는’ 이 서비스에서 네티즌들은 ‘후보’의 생김새와 성격 취미 등 자세한 인적사항을 미리 알고 접근한다. 덕분에 밥값, 커피값과 ‘폭탄(폭탄맞은 기분을 들 만큼 형편없는 파트너)’을 만날 가능성을 ‘절약’하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