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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정풍송/대중가요는 '사회'를 노래한다

입력 | 1999-09-16 18:22:00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중학교 시절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부르는 노래에 그만 홀리듯 빠져 버렸다. 제목을 물어보니 김동진선생님이 작곡한 ‘가고파’라고 했다. 그 때부터 가슴 속에서 ‘나도 저런 곡을 만들어야지’라는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동진 선생님이 계시던 서라벌예대에 진학해 작곡을 배웠다. 학교에서 클래식 음악을 배웠지만 작곡 과제물이 나오면 세미 클래식이나 대중 취향의 노래를 만들어 제출했다. 선생님께서 나무라셨지만 나는 “미국의 민요 작곡가 포스터처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선생님은 나의 길을 가도록 허락해주셨고 요즘도 찾아뵐 때면 내가 만든 ‘웨딩드레스’(가수 한상일)나 ‘옛 생각’(가수 조영남) 등이 참 좋다고 격려해 주신다.

처음 대중음악 작곡가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집안에서도 ‘풍각쟁이가 되려느냐’며 반대가 거셌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선 작곡의 길은 67년 첫 음반 ‘아카시아의 이별’을 낸 뒤 지금까지 32년 동안 이어졌다. 1년에 가요 영화음악 등 평균 50곡을 작곡했으니 어림잡아 1500곡 이상 발표한 셈이다. ‘석별’ ‘미워 미워 미워’ 등 숱한 노래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곡은 내가 작사 작곡한 조용필의 ‘허공’이다.

70년대말 극에 달했던 유신독재정권의 폭정으로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상황속에서 신음했다. 유신악법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눈치를 보면서 말조심하는 세상이었다. 10·26이 터졌다. 곧 다가올 것 같던 민주화에 온 국민은 가슴 설레며 기다렸다.

그런데 12·12, 5·17이 일어나면서 그렇게도 고대했던 민주화는 모두 ‘허공’속에 묻혀버리고 군사독재정권이 다시 등장했다. 너무 허망했다. 참담했던 심정을 그대로 삭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속풀이를 해야 견딜 것 같았다. ‘허공’이 제목으로 떠올랐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화.’ 당시 공륜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또 서슬퍼런 5공시절 나 자신의 몸보신을 위해 ‘민주화’를 ‘그대’로 대신했다. 이 노래가 그렇게 많이 애창됐던 것은 겉으로는 실연을 노래한 것 같지만 이심전심으로 이런 뜻이 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흔히 대중가요를 ‘역사의 거울’ ‘사회의 그림자’라고 한다. 동학란 때 민중은 녹두장군을 생각하며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노래했고 일제하에서 ‘황성 옛터’ ‘눈물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해방이 되고 원치않던 38선이 생기자 ‘가거라 삼팔선’을 노래했다. 6·25 전쟁중에는 ‘전선야곡’ ‘전우여 잘자라’와 피란민들의 어려움을 나타낸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렀다.

최근 우리 가요계를 보면 고약한 가사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노래들이 쏟아져 나와 불과 2,3개월 반짝하고 사라져 버린다. 먼 훗날에도 가슴속에 담아두고 싶은, 생명력있고 뿌리있는 노래가 많이 나와 국민의 정서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가요계종사자들이 노력해야 한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신세대 가요의 외국곡 표절 문제이다. 민족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표절은 절대 없어야 한다. 젊은 음악인들은 좋든 나쁘든 자기 스스로 생각해낸 노래로 대중앞에 나서야 한다.

정풍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