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마음에 학교의 반장이나 부반장을 권력처럼 여겼던 적이 있다. 그러나 타고나기를 똘똘하지도 못하고 똑똑하지도 못하여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서나 운동에서나 등수에 들지 못하기가 일쑤였고, 어쩌다가 등수에 들더라도 으뜸과 버금은 으레 남의 차지여서 반장이나 부반장 자리는 언감생심 쳐다도 못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줄반장은 줄이 몇 줄이건 줄마다 하나는 있는 자리인지라 줄반장 자리 하나는 아무 노력 없이도 저절로 차례가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내가 그 알량한 줄반장 출신이란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는 어느 줄이냐고 묻는 이를 지금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한다. 줄은 참 길기도 하고 질기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되면 더 되고 싶어서 희번덕거리거나, 될 일도 안되어서 두리번거리거나, 애시당초 될 일이 아니어서 끔벅거리는 이들만이 나더러 어느 줄이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우스개로 묻는 이도 있고 지나가는 말로 묻는 이도 있다.
나는 대답이 쉽지가 않다. 줄만 해도 한 가닥이 아닌 탓이다. 줄서기를 잘해야 하는 줄(列)도 있고, 줄을 잘 놓아야 하는 줄(緣)도 있고, 줄이 잘 닿아야 하는 줄(線)도 있고,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줄(繩)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네들은 그 가운데에서 어느 줄을 물었던 것일까. 나는 또 내 줄을 헷갈리지 않고 제대로 알고나 있었던 것인가.
이 줄반장 출신의 줄서기는 번번이 서툴다. 그래서 두루 미안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답답하고 따분하기도 하지만 생각처럼 얼른 고쳐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에 더욱 서툴러서 탈이다.
날씨는 아직도 한여름이지만 며칠 안 있으면 한가위이니 말 그대로 한가을이다. 한가을의 농촌 풍경은 보기 좋지 않은 것이 없다. 논밭에 어우러진 ‘인위자연’조차 ‘무위자연’의 정조를 자아내는 듯하여 보기가 좋다. 하지만 농약을 뿌리는 모습까지 아울러서 보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논두렁이며 밭둑의 풀이 꼴이나 퇴비로 자라지 않고 제초제 등쌀에 벌겋게 타죽은 모습을 보면 끔찍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농약을 쓰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거둘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제농민의 줄과, 무농약과 유기농업에 의한 환경농산물만이 사람도 살리고 환경도 살린다고 하는 환경농민의 줄 사이에서 나는 내 줄을 못 찾고 마냥 헤매기가 보통이다.
농촌이 시들해지면서 산지기 노릇도, 묘지기 노릇도 서로 마다하여 벌초하는 이가 따로 있지 않게 된 터에 적으면 식구끼리, 많으면 일가 사람들끼리 풀을 베어 조상의 무덤을 깨끗이 하러 다니는 모습은 해마다 봐도 보기가 좋다.
하지만 벌초는 반드시 추석 전에 하는 것이 예의요 원칙이라는 고정관념까지 그럴듯한 것은 아니다. 산마다 수풀이 복원되어 늘어난 독사나 말벌에 목숨의 위험마저 무릅쓰는 전통원리주의자들의 줄과, 추석은 추석대로 쇠되 독사와 말벌이 들어가고 가을걷이도 대강 추어낸 뒤에 여유있게 벌초를 하는 실용주의자들의 줄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꼴이야말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올해는 넉넉한 일조량과 늦더위로 농촌은 풍년을 예약했지만 어촌은 적조가 널리 일어서 흉년을 면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농어촌이니 농어민이니 해왔지만 농촌과 어촌은 본디 한줄이 아니었으니 나는 어느 줄로 기우는 것이 제대로 기우는 것일까. 농촌도 어촌도 아닌 동네에서 생선횟집을 하는 이가 어느날 나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언론에서 꼭 비브리오 패혈증에 대한 경고와 예방책을 전하되 꼭꼭 하는 말이 ‘어패류’를 날것으로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병균은 늘 굴 조개 소라 낙지 등 연체동물과 패류에서 번지는데 먹기 전에 떨떠름하고 먹고 나서 걸쩍지근하도록 왜 생선까지 싸잡아서 ‘어패류’로 이름지어 애매한 생선횟집에 상처를 입히곤 하는가.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신같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도 나서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여름이 다 가서야 이 말을 하고 있다. 어류쪽에 줄설 기회를 놓친 탓이었다.
줄이 여러 가닥이라서 줄서기에 서툰 것인가. 모르겠다.
이문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