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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이낙연/걸프전 터키 동티모르

입력 | 1999-09-22 17:43:00


지금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다. 대외원조 규모에서는 미국을 능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에 걸맞은 정치적 대접을 국제사회로부터 받지 못한다. 이유는 많다. 한가지 이유는 91년 걸프전 때 드러났다. 일본은 병력도 장비도 보내지 않았다. 헌법이 참전을 금지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일본은 다국적군(미국)에 무려 130억달러를 지원했다. 다만 그 돈을 몇 차례 나누어 냈다. 그것이 돈을 찔끔찔끔 낸다는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일본은 거액을 내고도 칭찬을 받지 못했다.

지난달 한국정부는 터키에 지진이 발생한 지 이틀 만에 7만달러의 구호금을 보냈다. 한국의 경제규모나 ‘6·25 혈맹’의 인연에 비하면 인색한 액수였다. 특히 한국 구조대는 지진 닷새 만에야 터키에 도착했다. 다른 나라 구조대는 생존자 구출이 어려워졌다고 보고 철수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터키 국민과 우리 교민들이 한국을 서운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쑥스럽지만 그것이 ‘터키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동아일보의 터키돕기운동을 낳은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번 동티모르 사태에 한국정부는 기민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국제사회가 다국적군 파견을 거론한 초기부터 한국도 파병을 검토했다. 유엔이 다국적군 파견을 결의한 다음날 국가안보회의는 400여명의 파병 방침을 세웠고 국무회의는 21일 420명의 파병안을 의결했다. 파병 결정의 신속성으로는 세계에서 15∼16번째, 규모로는 9∼10번째다.

이제 국회 동의 절차가 남았다. 쟁점은 전투부대를 포함시킬 것이냐 여부다. 포함에 반대하는 쪽은 전투병력 파견이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켜 한국에 경제적 손해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2만여 교민의 신변과 생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찬성하는 쪽은 동티모르 주민이 선택한 독립을 돕고 인권유린을 막으려는 유엔의 결의에 동참하는 것은 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연하다고 말한다. 우리 의무부대와 공병부대의 안전을 위해서도 전투부대 파견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상당수 국민에게 전투병력 파견은 좀 느닷없는 발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베트남전 참전 이후 34년 만의 일이고 동티모르가 우리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교민의 안전과 생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는 한국교민이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군중의 감정이란 꼭 이유가 있어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티모르보다 인도네시아가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기는 다른 파병국들도 비슷할 것이다. 우리도 6·25 때는 16개국 군대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도움으로 이만한 땅이나마 지켰다. 48년에는 유엔 감시 아래 선거를 치러 독립국이 됐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눈 앞의 일에 함몰돼 바깥 세상의 아픔을 고민한 적이 별로 없다. 이제는 한국도 국제사회에 공헌하며 살 때가 됐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 방법을 놓고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해 현명한 결론을 내기 바란다. 그런 논의 자체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한국을 한뼘쯤 성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특별히 유의했으면 한다. 어느 쪽이든 최종결정을 너무 늦추지 말고 행동을 찔끔찔끔 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터키 지진 때의 한국이나 걸프전 때의 일본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낙연naky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