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한국 영화 ‘넘버3’가 추석 연휴기간에 TV에서 방영됐다. 날카로운 사회풍자가 반짝이는 이 영화에서 기업화된 깡패들의 아침 회의 장면을 들여다보자.
▽사장 깡패〓니들두 공부 좀 해라. 오늘 아침 신문 보니까 마피아들은 인터 뭐더라.
▽주인공 깡패〓인터넷 말씀이십니까?
▽사장 깡패〓그래, 인터넷으로 조직원을 모집한다더라. 재떨이 넌 인터넷이 뭔지 알아?
▽재떨이 깡패〓국제 경찰 아닙니까?
▽사장 깡패〓그건 인터폴이구, 이 무식한 놈아.(때맞춰 전화벨이 울리자) 이건 인터폰이구!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얼마전 미국 출장에서 느꼈던 긴장감을 떠올렸다. 미국에 수출할 테마파크용 시뮬레이션 ‘라이드 필름(Ride Film)’에 들어갈 컴퓨터그래픽(CG)을 준비하는 회의에서 미국 프로듀서, 감독과 미술 담당이 보여준 프로 의식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인건비를 아끼느라 풋내기들을 썼는데도 한국의 웬만한 감독들보다 영화 속 CG에 대해 훨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할리우드 젊은이들의 진지한 자세를 보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대학시절 나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독립영화집단의 촬영보조스태프로 일하다가 처음 CG 작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 신씨네의 특수효과 파트에 입사해서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CG가 사용된 ‘구미호’에 참여해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하나씩 배워나갔다. ‘은행나무침대’로 자신감을 얻어 96년 독립해 회사를 차렸다. ‘초록물고기’‘간첩 리철진’ ‘자귀모’ 등의 CG 시각효과를 맡았다. ‘자귀모’는 90여분의 상영시간 중 특수효과가 20분을 차지했는데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귀신이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저승기차 장면은 많은 칭찬을 들었다.
21세기에는 특수효과가 영화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효과가 될 것이다. 물차가 비를 뿌릴 필요없이 CG로 비를 만들 수 있고 돌풍 화산폭발 등 다양한 자연현상도 연출할 수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특수효과 작업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 영화인’들의 자세는 정확하게 둘로 나뉜다. 컴퓨터 기술에 대한 맹신과 불신이 그것이다. 특수효과처리가 불가능하게 촬영한 필름을 들고와 “컴퓨터로 알아서 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가장 흔한 사례다. 특수효과나 CG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관객에게 좀 더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을 선보이기 위해 쓰는 영화의 기본 도구다. 감독들이 CG에 대해 무지한 것은 의사가 새로 나온 의료기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어느 감독은 CG로 완성한 장면을 보고 “아주 훌륭하다”고 감탄한 후 다시 실사 촬영으로 찍는다고 한다. “내 영화에 컴퓨터가 만든 그림이 들어가는 게 무조건 싫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실제 촬영장면은 CG로 만든 컷보다 별로였다는 평을 들었고 제작사만 두배 세배 비용을 추가 부담했다.
할리우드에 대항해 아시아권 시장을 형성하는 데 한국영화가 주역이 되려면 이대로는 안 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이 만개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정치적 토양과 막대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지만 미켈란젤로처럼 끊임없이 탐구하는 아티스트가 있었던 게 진짜 이유가 아닐까.
인터넷이 뭔지 모르고서야 마피아 조직원이 되기도 어려운 세상이라는데 나를 포함한 한국 영화인들은 좀 느슨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박관우(특수효과회사 DGFX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