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전 대통령이 학생 시절에 입학 절차와 관련해 1907년에 미국 하버드대에 물어본 편지가 오늘날까지도 하버드대 고문서실에 남아있고 1908년에 미국 프린스턴대에 물어본 편지가 오늘날까지도 프린스턴대 고문서실에 남아 있다면 곧이 들릴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프린스턴대의 경우 ‘이승만군은 너무 가난한 만큼 박사학위증 수수료를 면제해주기 바란다’고 지도교수가 총장에게 보낸 1910년의 짤막한 메모도 보관되어 있다. 이 무렵의 이승만은 극동의 망해가는 나라의 한 작은 청년일 뿐이었는데도 그 대학들은 기록을 모두 보관했던 것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의 그날에 서울의 방송국에서는 뭐라고 방송했고 평양의 방송국에서는 뭐라고 방송했는지의 기록은 서울에도 평양에도 없으나 미국에는 남아 있다. 미국의 ‘해외방송정보처(FBIS)’는 전 세계의 방송들을 들으면서 영어로 번역해 매일같이 ‘일일 보도’라는 책을 출판해 왔기에 해방 3년의 남북한의 방송 내용, 한국전쟁 37개월의 남북한 방송 내용을 전부 읽을 수 있다. 게다가 ‘공동출판연구처(JPRS)’는 전 세계의 주요 신문과 잡지의 중요한 기사들을 영역해 매달 출판해 왔기에,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예컨대 동아일보의 사설이나 해설기사, 신동아의 기획기사 등도 샅샅이 읽으며 한국의 정세와 여론을 살핀다.
◇美 방대한 정보 관리
확실히 미국은 기록의 국가이다. 장관급의 행정 책임자가 이끄는 ‘국립문서기록처(NARA)’는 여러지역에 ‘국립문서기록관’을 두고 참으로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관리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과 관련해 남북한에서 가져간 문서들, 이른바 ‘노획된 북한문서’의 양은 우리 국립도서관 크기의 도서관 하나를 다 채울 만큼 엄청나게 많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서울 어느 동(洞)의 주민들이 ‘인민위원회’에 써낸 ‘반성문’과 ‘충성 서약서’도 그곳을 뒤지면 읽어 볼 수 있다.
미국은 어째서 이렇게 문서와 기록을 철저히 보존하는가. 역사는 바로 문서와 기록 위에서 기술되고 평가되며 후세에 교훈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예를 들면 미군이 비록 작은 규모라도 참전하는 전쟁이나 전투에는 반드시 ‘역사 부대’를 함께 보낸다. 이 ‘역사 부대’는 현지의 자료들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그날의 일들을 모두 정확히 기록하려고 애쓴다.
최근 미국 AP통신은 미국 정부의 비밀해제된 문서들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6·25전쟁 때 피란길에 오른 영동읍 주민들을 미군이 노근리에서 학살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결코 가볍게 지나갈 수 없다. AP보도에 따르면 무려 120명 정도의 양민들이 억울하게 학살됐고 현지 주민들의 증언으로는 무려 400명 정도가 희생됐기 때문이다. 우선 기록과 증언을 중심으로 두나라 정부 차원에서 공정한 조사가 곧바로 이뤄져야 한다. 희생자들의 신원(伸寃)을 위해서나 법적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한미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진상이 철저히 밝혀져 미국쪽에 잘못이 있었다면 미국 정부는 마땅히 공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때 이미 미국 시민이 됐건만 적국 일본 출신이라 하여 집단 수용소에 가뒀던 일본계 미국 시민들에게 뒷날 공식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배상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점에 미국의 대국다운 금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후대엔 살아있는 역사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우리 정부 스스로 또는 우리 학계나 언론이 먼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라도 정부 차원에서 진상을 규명했어야 옳았다. 자료가 없다는 설명에, 당시의 긴박했던 후퇴의 위기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우리의 후진적 기록 문화를 반성하게 된다. 동티모르에 상록수 부대를 보내면서 ‘역사부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역사군인’은 함께 보냈는지 묻게 된다. 우리도 21세기에는 국가가 문서와 기록을 정직하게 생산하고 철저히 보존하며 관리하는 새로운 문화를 세워야 하겠다. 그리고 다른 선진국에서처럼 ‘국립현대사연구소’를 세워 굴절이 많았던 한국 현대사의 많은 불분명한 부분들을 실증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 총장〉h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