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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동춘/노근리 뿐이랴…

입력 | 1999-10-04 18:38:00


‘오호 애재라. 오호 통재라. 그 당시의 가해자는 이민족이 아니었으며 우리 동포의 손에 의한 것이고, 그 수난 장소가 고국산천 정든 고향이었으며, 총이나 칼 무기는 말할 것도 없이 곤봉이나 젓가락 가지지도 않은 적수공권의 양같이 순한 인사들이었고, 수난 중에 한사람이라도 반항하는 이나 거역하는 이가 없었고….’

60년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합동묘지 제막식에서 낭독된 추도사이다. 이 애끊는 추도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5·16의 군화발은 ‘사건’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들마저 ‘용공분자’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었다.

▼양민학살사건 곳곳서▼

합동묘소의 봉분을 처참하게 파헤치고 위령비 비문의 글자를 모두 뭉개버렸다. 거창 사건을 포함한 6·25 발발 전후 한반도 거의 전역에서 발생했던 양민 학살 사건은 또다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쟁 당시 직접 지휘 계통에 있던 군인 경찰 간부들이 이후 1, 2, 3공화국 시절 경찰서장 치안국장 국회의원 장관 등 대한민국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피해자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불이익을 당할까봐 자식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발설하지 않은 채 한 많은 삶을 꾸렸다.

9월29일 AP통신은 한국전쟁 당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이 피란민 수백명을 학살한 사건을 확인해 보도했다. 그동안 부인으로 일관하던 미 당국과 클린턴 대통령도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섰다.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에서 있었던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20세기의 부끄러운 ‘역사’의 산 교과서가 된 바 있다. 늦었지만 미 당국이 이러한 전향적 태도를 보인 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48년 제주도에서 ‘누가 누구를’ 얼마나 죽였는지, 전쟁 직전 30만명의 보도연맹원 중 몇 명이 처형되었는지, 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 전역에서 어느 정도의 양민이, 누구의 명령으로, 왜 살해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피해자들이 그렇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했음에도 역대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거창 사건처럼 가해자들이 곧 그 지역을 떴으며, 지역구 국회의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회에서 폭로한 경우에는 사건 발생 당시부터 상당수의 국민에게 알려지기라도 했다. 학살의 가해자들이 지역사회의 힘있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 ‘학살’을 정당화하고 침묵을 강요했던 경기 고양 같은 곳에서는 사건 발생 후 무려 40여년이 지난 80년대 말 이후에야 가족들이 학살 현장에 접근할 수 있었고,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金대통령의 숙제▼

오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코소보와 동티모르의 ‘인종청소’는 잘 알고 있어도 50년 전 한반도의 그 ‘아름다운’ 들판과 골짜기에서 벌어진 ‘양민 학살’은 알지 못한다. 지난 50여년 동안 분단체제의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은 “좌익에 의한 우익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는데 무슨 소리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빨갱이와 같은 편이다”라는 논리로 거론 자체를 막았다.

전쟁 범죄는 국가의 기본적인 도덕성과 관련돼 있다. 아무리 전쟁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군인과 경찰이 양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한다면 그 국가는 ‘국민의 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AP통신의 집요한 추적과 미 당국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한국 정부, 언론과 지식인, 당시 가해자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인권’ 대통령을 자임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전쟁 당시 피학살자 실태 파악과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 언론 역시 지금부터라도 전쟁당시 양민학살 사실을 남김없이 취재해 밝혀야 한다.

이번 미국측 참전 군인이 ‘정신의 안식’을 위해 노근리의 학살을 털어놓았듯이 당시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던 군인들이나 명령에 의해 학살에 가담한 군경도 생존자들과 유족 앞에 나서 묵은 짐을 털어야 한다.

새 밀레니엄을 앞둔 오늘, 정부 당국과 살아남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학살 현장에서 ‘신의 가호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직 그 질긴 인생을 마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