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기 전 유럽은 다른 문명권으로부터 고립된 저개발지역으로,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구 기독교 세계를 덮친 암흑 시대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을 통해 유럽은 문학적 예술적 전통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십자군 운동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의 패권을 향한 길에 들어서 있었다.》
1095년 첫번째 십자군 운동에 참가하도록 유럽의 기사들을 소집한 교황 우르반 2세는 자신이 일으킨 운동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서구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유럽인들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대신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에 나서도록 함으로써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고 교회의 힘을 강화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십자군 운동을 선포한지 채 몇달도 되지 않아 유럽인들은 남녀노소와 직업을 막론하고 성스러운 도시를 향한 위험스러운 여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십자군 부대가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도착했을때 오래전부터 서구 기독교들을 무뢰한으로 무시해오던비잔틴인들은야만족의침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경악에 찬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유럽은 십자군 운동을 통해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십자군 운동이 계속됐던 200년 동안 유럽 각국에서 다양한 계급의 사람 수천 명이 성지를 지키기 위한 여행에 나섰으며 중동 지방에 유럽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 지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에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 십자군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질병으로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십자군 운동은 또 유태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서구의 적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은 그리스도를 죽인 유태인들이 유럽의 한복판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며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1099년 7월에 첫 번째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태인과 이슬람교도 3만명이 이틀만에 모두 학살당했을 정도였다.
십자군이 남긴 이런 비극적인 역사는 오늘날에도 특히 중동지방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십자군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유럽인들의 살기어린 반유태주의 때문이었다. 또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의 난폭함에 대한 기억 때문에 서구인들이 언제나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믿음을 지금까지 간직하게 되었다.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와 서구의 기독교를 지금도 ‘알살리비야’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알살리비야’는 ‘십자군’이라는 뜻이다.
▽필자〓카렌 암스트롱(‘예루살렘―한 개의 도시, 세 개의 신앙’의 저자)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4/armstron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