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헤매다 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한답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번 보내 주신 약꾸러미 신문 한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을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시집‘숲은 사각형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민음사)에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이 아픈 사람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다는 이 사람은. 사실은 당신도 나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마음의 폐허를 간직하고 있지. 나만이 아는 나나, 당신만이 아는 당신이 웅크리고 앉아 쓴 편지같은 시.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폐허의 문을 열어주고 바람을 스미게 할 발짝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 속으로 데려가 줄 그 영혼의 발짝 소리를.
신경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