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점차 높아가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최근 중국 내 탈북자 가운데 일부에 대해 ‘난민(refugee)’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등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정부도 이르면 내년부터 해외 체류 탈북자들을 돕는 민간단체에 대해 예산을 지원할 뜻을 밝혔다.
▼실태
12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영구임대주택인 S아파트. 4년 전 러시아 벌목공으로 일하다 8명의 동료와 함께 탈북한 한모씨(39)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갔다. 석달 전 자신의 탈북 직후 수용소로 추방됐던 10, 11세된 두 아들이 끝내 굶어죽었다는 비보를 접했기 때문.
함흥 출신으로 의학전문학교 과정을 마친 뒤 한의사로 일하던 한씨가 러시아로 건너간 것은 92년초. 75원의 월급으로 여섯식구의 끼니조차 잇기 힘들던 당시 한달 7000∼8000원의 수입이 보장된 ‘러시아행’은 한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95년 여름의 대홍수로 식량난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전쟁위기설이 감돌자 한씨는 ‘승산 없는 전쟁에 내몰려 죽기보다 먼저 남한에 가서 가족을 기다리자’는 결심으로 목숨을 건 탈북을 결행했다.
그러나 10여차례에 걸친 망명신청에도 불구하고 현지 한국공관들은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한씨를 외면했다.
망명이 성사되기까지 북한의 특무(체포조)와 공안들의 감시를 피해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러시아 곳곳을 떠돌던 1년여의 탈북생활은 피말리는 지옥의 나날들이었다.
현재 이처럼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는 5만∼10만명. 이 가운데 남한으로 들어온 탈북자는 90년 이후 최근까지 427명에 불과하다.
2년 전부터 중국이 국경관리방해죄를 신설하고 탈북자 신고시 500위안(약 5만원)을 주기로 하자 그동안 탈북자들에게 우호적이던 중국 내 조선족들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97년 탈북한 김모씨(35)는 “탈북자를 보호하다 발각될 경우 1000위안의 벌금과 최고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기 때문에 현지 조선족들도 탈북자를 외면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박요셉 북한동포돕기사업국장은 “탈북자들로부터 하루에도 수차례씩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는 국제전화가 걸려온다”고 말했다.
▼적발과 처벌
7월13일 함경북도 혜산 연봉비행장에서는 18명의 탈북자가 공개처형됐다. 이 가운데는 국내 한 민간단체가 중국에서 운영중인 탈북자 장기은신처를 다녀간 광업대학생인 김호철씨(34)도 포함돼 있었다.
이 단체의 한 자원봉사자는 “최근 북한을 빠져나온 탈북자들이 6, 7월 혜산에서만 두 차례의 공개처형이 더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의 급증으로 주변국가의 따가운 시선을 끌게 된 북한은 최근 이들의 색출과 처벌에 혈안이 돼 있다는 게 현지 탈북자들의 증언.
탈북자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 쓰레기통을 뒤지다 붙잡혀 강제송환되는 탈북자들이 부지기수”라며 “출신성분이 좋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사형을 당하거나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고 전했다.
▼난민지위 부여 논란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탈북자를 도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들이 ‘난민 지위’를 부여받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법상 ‘난민’으로 인정되면 더이상 강제송환의 불안에 떨 필요도 없고 유엔구호기구가 현지에 마련한 수용소에서 보호받거나 본인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제삼국으로의 이주가 가능하기 때문.
그러나 1951년 마련된 난민협약과 유엔고등판무관 사무소 규정에는 ‘순수한 경제적 사유는 난민자격에서 제외된다’고 돼 있다.
또 난민협정에 가입한 중국도 북한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피하기 위해 탈북자를 단순한 ‘불법월경자’로 간주하고 체포와 동시에 강제송환의 관례를 고집하고 있다.
▼대책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들이 ‘남한행’을 고대하며 피신중인 탈북자들을 적극 돕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부는 사실상 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실정.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열쇠’를 쥔 중국이 탈북자를 난민이 아닌 단순 불법체류자로 간주하는 이상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며 “정부차원에서 외교적 채널을 통해 다각적인 노력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탈북자 지원단체의 한 관계자는 “인권 및 민족적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