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장르의 음악이 번성했다. 특히 대중음악은 재즈의 농염함, 로큰롤의 폭발성, 디스코의 휘발성, 랩의 불온함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각 장르의 미덕이 융화돼 발전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또 그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로큰롤이 지니는 차별성은 ‘시대적 장르’가 아니라 ‘세대적 장르’라 할 만했다. ‘청춘의 음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도 대중음악계에 ‘세대차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것도 모두 로큰롤에서 비롯됐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는 이 로큰롤 현상의 정점이었다.
56년 9월 9일 밤 5300만명의 미국인들은 단 한 젊은이를 보기위해 TV채널을 고정시켰다. 당시 21세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골반춤과 흑인창법은 미국인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율을 안겨줬다.
당시 2차대전 후 미국이 누렸던 풍요 속에 ‘이유없는 반항심’을 품었던 젊은이들에게 그는 섹스와 하위문화라는 금기의 봉인을 멋들어지게 풀어낸 영웅이었다. 반면 부모세대에게 그는 저속한 문화를 자녀들에게 전염하는 악마였다.
이처럼 태동기의 로큰롤을 완벽히 육화(肉化)해냈던 엘비스도 눈썰미 좋았던 한 지방레코드사의 여직원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트럭운전사로 역사의 뒤편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엘비스를 발굴한 것은 테네시주 멤피스의 지방레코드사인 선레코드사였다. 선레코드는 20여평 규모의 스튜디오에 단돈 4달러를 받고 일반인들이 직접 부른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주던 영세 레코드사였다. 하지만 지역방송의 인기 DJ출신이던 선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는 당시로서는 천대받던 흑인 블루스를 주류음악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흑인처럼 노래하는 백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53년 어느 여름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세짜리 트럭운전사의 재능을 발굴한 것은 필립스가 아니라 그의 여비서 매리온 카이스커였다. 카이스커는 어머니 생일선물로 자신의 노래를 선물하기 위해 선레코드를 찾은 엘비스가 필립스가 찾던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필립스가 그의 재능을 확신하는 데는 다시 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필립스는 카이스커의 거듭된 추천으로 이듬해 여름 엘비스의 데뷔앨범을 만들 때까지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러다 휴식시간에 예정에도 없이 ‘댓츠 올라이트 마마’라는 블루스를 부르는 엘비스의 모습에서 비로소 자신이 찾던 음악을 체감했다. 그는 이 노래를 첫 싱글곡으로 엘비스를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필립스도 엘비스의 진정한 ‘상품성’은 몰랐다. 필립스는 다른 가수 발굴을 위해 55년말 엘비스와의 전속계약을 3만5000달러에 RCA에 팔았다. 그리고 불과 1년이 안돼 엘비스는 백만장자가 됐다.
반면 대서양 건너 영국의 머시강변을 날아다니던 ‘딱정벌레들’은 천재적인 유태인 청년 사업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식 앨범 한 장 내지 못한 무명의 밴드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61년 10월 28일 오후 27세의 나이에 이미 영국 제2의 항구도시 리버풀 최대의 레코드점 NEMS의 사장이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레이먼드 존스라는 소년으로부터 ‘비틀스’라는 밴드의 음반 주문을 받았다. 엡스타인은 영국 동북부에서 최대로 방대한 음반목록을 확보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같은 이름은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다. 자부심에 상처를 받은 그는 며칠후 NEMS에서 불과 수십m 떨어진 캐번클럽이라는 지하카페에서 공연하던 하류층 출신의 이 무명 밴드를 찾아냈다.
시벨리우스 같은 고전음악에 심취했던 그로서는 비틀스의 음악은 굉음에 가까웠지만 한눈에 비틀스가 당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주술같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무명가수의 백밴드로 독일에서 취입한 음반 한장밖에 없던 이들의 매니저를 자청했다.
우선 가죽잠바 차림의 이들을 깔끔한 양복으로 갈아입혔다. 또 데카 콜럼비아 등 굴지의 레코드사들로부터 번번이 음반 취입을 거절당하면서도 10개월의 줄기찬 노력끝에 마침내 파로폰사와 계약을 이끌어냈다.
미국상륙을 앞두고 5만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액수의 홍보전을 기획한 것도 그였다. 각 언론사에 비틀스의 녹음테이프가 돌려졌다. ‘비틀스가 온다’라는 전단도 수백만장이 배포됐다. 그 결과 64년 2월7일 뉴욕 케네디공항에 비틀스가 도착했을 때 5000여명이라는 케네디공항 사상 최대의 환영인파가 몰려들었다. 에드 설리반쇼 출연에서는 엘비스의 기록을 깨며 7300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청춘의 시대였던 60년대의 마스코트가 됐다.
필립스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엘비스를 통해 이뤄냈다면 엡스타인은 자신의 사업가적 재능을 비틀스를 통해 실현했다. 하지만 그는 비틀스가 성공의 정점에 섰던 67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죽음은 비틀스 해체의 전주곡이었다. 비틀스는 이후 대중과 유리된 채 스튜디오 속에 파묻히다 70년 공식 해체됐다.
〈멤피스·리버풀〓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