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교수 자리를 잡으려고 이 대학 저 대학 인터뷰를 다닐 때 일이다. 거의 2년 남짓 나는 가는 곳마다 여성과학자에게 자리를 내주며 차석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물론 그들은 모두 객관적으로 볼 때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업적을 쌓은 이들이었지만, 당시 여자교수의 비율을 높여야 했던 각 대학의 사정도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안다.
이같은 다분히 정치적인 노력으로 미국에서는 여성의 과학기술계 진출이 지난 10여년간 상당히 많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과학과 기술은 대체로 금녀구역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경우는 그 성비(性比)불균형이 불합리를 넘어 수치스러운 수준이다.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는 바로 이 불균형에 관해 논의한 여러 학자들의 수상을 엮은 책이다.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사회학자와 과학사학자들은 물론 모혜정, 김명자교수 등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과학자들이 참여해 이론과 실제의 균형을 이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여자와 남자란 염색체 한 조각밖에는 다른 것이 없지만 그로 인한 유전적인 차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차이로 인해 여성이 사회적으로 열등한 성이 되어야 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남성과 여성은 그저 다를 뿐이다. 꼭 잘나고 못남을 따진다면 쭉정이 염색체를 가진 쪽은 사실 남성이다.
시대는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절규했던 ‘제2의 성’은 이제 바야흐로 헬렌 피셔의 ‘제1의 성’(피셔의 최근 저서)으로 당당히 탈바꿈하고 있다.
여성은 더 이상 열등한 존재가 아니며 여성우월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월등함이 입증된 우리 여성들에게 과학은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 자리를 비워줄 때가 온 것이다.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는 이런 준비작업을 위한 좋은 입문서이다.
홍성욱(서울대교수·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