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한 ‘99 서울경제포럼’에 참가한 전경련 국제자문단은 22일 한국의 대외정책,경제구조 개혁에 대해 공개토론을 가졌다. 키신저 전미국국무장관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배경과 한계를 자신의 경험담을 섞어가며 명쾌하게 설명했고 사토 미쓰오 전아시아개발은행(ADB)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식 위기해법을 강력히 비난했다. 리콴유 전싱가포르총리는 서구적 가치와 세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최종 결정은 아시아인 내릴 일”이라고 말해 아시아적 가치 신봉론자 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키신저 前美국무▼
◇“美 對北협상에 한국 참여시켜야”◇
우리가 사는 세계는 ‘국제화’된 세계다. 그러나 세계화는 하나의 과정이지 질서가 아니다. 냉전은 분리된 세계를 관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며, 후기 냉전에 접어든 지금은 어떻게 상호의존성을 관리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아시아는 다양성이 존재하며 협력과 갈등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어느 한 나라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고 국가간 형평성에 입각한 협력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도 항상 국제사회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미국도 중국을 옛 소련처럼 적대시할 것이 아니라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51년 미군 자문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부산과 의정부간 국토가 폐허가 돼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주요한 국가로 성장했다. 한국인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은 대외정책을 펴는 데 있어 강대국 사이에서 미묘한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힘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다.
북한은 지금 폐쇄정책과 강경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들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양보와 양보의 대가로 얻는것사이에서균형을취할필요가있다.
미국은 대북 협상에서 남한을 배제한 비밀협상을 벌이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과거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정부를 배제하고 베트콩과 비밀협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실수였음이 분명하다. 미국은 한국이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북한과의 협상과정에 한국 정부를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리콴유 前싱가포르총리▼
◇“한국 능력있는 경영자확보 시급”
한국은 일본을 모델로 산업화의 길을 걸어왔다. 일본 경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유무역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가 됐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후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가 커지자 일본시장에 대해 개방요구를 강화했고 시장 폐쇄로 성공했던 일본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일본 국민의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았고 금융시스템도 취약하다. 일본은 결국 국제 질서에 굴복하고 말았다.
한국도 일본과 똑같은 상황이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자본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면 일본과 같은 실패를 맛보게 될 것이다. 미국의 룰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아시아 금융위기는 외채문제만은 아니었다. 태국의 경우 외환시장 폐쇄, 금리인하, 통화량 증가라는 자신만의 정책을 실시해 결국 현재는 회복되고 있다.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더라면 붕괴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은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한국은 태국과 다르다. 외채가 많아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경제위기 전에 거품이 있었고 과잉투자, 금융왜곡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기존의 재벌체제에도 문제가 있다. 경쟁력 없는 사업은 정리돼야 하고 수익성 위주의 기업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물론 아시아적인 가치의 중요성이 있는 만큼 무조건적으로 서방의 의견을 따를 것이 아니라 나름의 가치에 따라 구조조정을 실시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에 있지만 한국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재벌 해체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재벌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기 보다는 능력있는 경영자를 확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경영자 관리와 확보체계를 배울 필요가 있다.
▼사토 前아시아銀총재▼
◇“IMF 한국처방 멀쩡한소 죽인꼴”◇
사토 미쓰오 일본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 상임고문(전 아시아개발은행 총재)은 한국의 경제위기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대응은 ‘멀쩡한 소를 죽게 만든 교각살우(矯角殺牛)식 처방’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사토 고문은 2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자문단 창립회의에서 “한국 경제위기에 대한 IMF의 처방은 대량실업과 급속한 경기침체를 유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시아 금융위기는 막대한 자본이 이동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며 “재정 및 통화 긴축과 즉각적인 구조조정 등 IMF의 처방은 오히려 실물경제의 하락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한국의 경우 고금리정책과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상향조정만 없었다면 실물경제의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는데도 IMF 처방을 따르는 바람에 기업도산과 대량실업을 불러왔다는 것.
그는 국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기상황 초기에 조건없는 대규모 금융지원 △재정긴축과 통화억제보다는 적절한 재정확대 △BIS 비율 적용의 한시적 유보 등 새로운 정책 대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훈기자〉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