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이면 조금씩 시려지는 하늘이 점점 높아진다. 아직 이른 저녁으로 느껴지는 시간인데 그림자가 땅거미 속으로 스며든다. 해가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문득 잦은 비에 속상했을 농사짓는 분들의 모습이 떠올라 답답해지는데 그 뿐, 여름이 퇴색해버린 나뭇잎들이 쓰레기로 치워지는 모습에 더 마음이 쓰인다. 어느 결에 이렇게 철저하게 도시인이 되어버린 것일까? 어느 새 나뭇잎에다 운명을 투사할 만큼 세월을 살아버린 것일까?
▼해마다 앓는 향수병▼
가을이면 고향에 가고 싶다. 잃어버린 세월이 혹 거기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하는 궁금증에 쫓기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스친 세월에 시달린 지침이 마침내 느긋해지는 그런 휴식이 거기 기다리리라 여겨 서두르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가을은 고향에 가고 싶음을 감기처럼 앓게 한다. 지난 해 가을에도 그랬다. 그 전에도 그랬었다. 당연히 오는 해 가을에도 또 그럴 것인데, 아마 이 병을 쉽게 고치지 못할 듯 하다.
북녘이 고향이면 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분들이라 해서 고향 삼아 정을 심은 곳이 이 곳 남녘 땅 어디엔가 없을 리 없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고향에 이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낯익은 사람들 이제 거의 없지만, 눈감고도 걸을 골목길 낯설어지고 눈익은 담장 다 없지만, 그래도 산마루가 여전하고 바람소리 햇살 쪼임이 다르지 않으니 갈 고향이 없을 까닭이 없다. 봇짐을 싸고 신끈을 맨다. 아니, 마실 것 조금 싣고 주유소에 들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우뚝 선 채 스스로 망연하다. 벌써 버린 지 하도 오래여서 그럴까? 돌아옴을 다짐하지 않은 떠남이어서 그럴까? 하룻밤은 커녕 뉘엿거리는 노을을 바라볼 툇마루도 없을 고향을 그리는 것은 참 염치없는 욕심이다. 가면 고향일 터인데 이미 낯설어진 고향의 산 그림자에 묻혀 을씨년스러울 저녁은 생각만 해도 아프다.
떳떳하지 못한 향수를 달래줄 고향은 없다. 두근거림으로 마음은 귀향을 서둘지만 가을 아침의 투명한 인식은 고향의 실종을 확인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뿌리 뽑힘으로부터 말미암는 표류가 아니라 아예 뿌리 없음의 실존을 선고받는 징벌이다. 하긴 그렇다. 가을은 결실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심판의 계절이다. 징벌은 풍요를 통한 보상처럼 뚜렷한 가을의 징표이다. 그렇다면 고향을 향한 내디딤을 서둘기 전에 스스로 저울 위에 올라서는 모험부터 감행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무게에 자신 있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야 했다. 고향의 현존이 삶의 무게와 더불어 그 실재성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는 사실을 깊은 바탕에서부터 터득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가난한 가을 맞이는 종내 고향의 상실을 선언 당한 채 쓸쓸하다.
▼종말을 응시하는 계절▼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계절은 기다림을 용서하지 않는다. 가을은 무게를 다는 일을 조금도 유예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쫓기는 세월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 귀향을 의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게를 다는 일보다 더 근원적으로 고향에 가고 싶은 간절함을 삭이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있지도 않을 고향을, 비록 있다 해도 초라한 가난 때문에 반겨질 아무런 까닭도 없을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이 가을에서 결실의 무게와 아무런 상관없이 끝내 이르지 않으면 안될 ‘귀향의 필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어떤 필연이 가을을 겪는 누구에게나 귀향을 충동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가을은 이제 계절의 순환이 마지막에 이르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실을 심판하는 현실과 더불어 가을의 본질은 종말의 징후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을은 마치 계시처럼 삶에 스며들면서 누구나 참 오랜만의 순수를 통해 귀향을 스스로 독촉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을에는 삶의 종말을 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가을의 윤리이다.
아까 따라 놓았던 차가 식었다. 찬 차를 버리지 못하고 더운물을 조금 더 붓는다. 찻잔이 엷게 따뜻해진다. 가을이다.
가을에는 고향에 가고 싶다.
정진홍(서울대 교수·종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