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한 국가부패지수(CPI)와 뇌물지수(BPI) 결과를 접한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게 될까. 아마도 ‘기업은 뇌물로 거래를 성사시키고 공직자는 뇌물만 주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인 나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번 TI의 조사결과는 상당히 우려할만한 수준이었다.》
▼예상보다 충격적인 결과▼
CPI는 각 나라 공직자 및 정치인의 부패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이며 BPI는 기업들이 외국과 거래하는 과정에서 그 나라의 공직자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다.
가장 청렴한 국가로 조사된 덴마크의 CPI를 10점으로 쳤을 때 한국은 3.8점에 불과해 조사대상 99개국 중 50위에 그쳤다. 지난해 성적 4.2점(85개국중 43위)과 비교해 전체조사대상국 가운데 정확하게 중위권에 위치한 점은 같았으나 점수로는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9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올해는 말레이시아(32위)와 몽골(43위)보다 부패정도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TI가 올해 처음 발표한 BPI 역시 가장 투명한 정도를 10점으로 했을 때 한국은 3.4점으로 3.1점을 얻은 중국에 이어 조사대상 19개 국가중 두번째로 뇌물을 많이 제공하는 국가로 조사됐다.
조사결과는 국제투명성기구의 인터넷 사이트(www.transparency.de 또는 www.transparency.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점수는 어떻게 산출했나▼
CPI는 지난 3∼4년간 갤럽인터내셔널 월스트리트저널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 등 10여개 기구에서 실시했던 17개의 각종 여론조사결과를 종합해 산출됐다. 이중 올해 실시된 여론조사는 3가지. 따라서 올해 발표된 지수는 주로 96∼98년의 부패상황을 나타내며 99년의 상황은 일부만 반영된 셈이다.
BPI는 TI가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인터내셔널에 의뢰해 전세계 교역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14개 교역국을 선정, 각 나라의 기업인과 은행인 공인회계사 상공회의소 임원 등 770여명을 상대로 조사한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14개 국가는 아시아 5개국, 아메리카 3개국, 유럽 3개국, 아프리카 3개국 등이었다.
TI는 설문자들에게 수출업체들이 외국과 거래할 경우 외국의 고위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국내 각계의 반응▼
정부와 기업들은 대부분 “결과에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기업 A사의 한 임원은 “선진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기업이 성의로 주는 선물도 모두 뇌물”이라며 “지나친 서구의 가치관에 따른 결과로서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전국경제인연합회 K씨도 “TI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뇌물공여 등 부정부패에 대한 총체적 불감증이 심각하다”며 관련법 제정 등 반부패노력강화를 촉구했다. 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운동본부는 “부패방지법 등 법령마련과 함께 국제기준에 맞는 기업문화 정착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어떤 파장이 예상되나▼
TI는 비정부기구이기 때문에 이번 결과가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아니라고 해도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휴화산’과도 같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지적.
우선 세계의 각종 기구와 기업들이 TI자료를 자주 인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부패국가’라는 오명(汚名)이 자주 거론될 수 있어 자칫 국가신용도의 하락을 가져올 수 있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반부패협약을 97년에 제의한 단체가 바로 TI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결과가 향후 국제무역제재에 직간접적인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올해 2월15일 한국을 포함한 29개의 OECD회원국과 5개의 비회원국 등 34개국이 서명해 발효된 ‘OECD 반부패협약(부패라운드)’은 국제거래시 외국관리들에게 뇌물을 약속하거나 제공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 당사자를 형사처벌하거나 금전적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부패라운드’의 출범에 따라 국내에서도 ‘해외뇌물방지법’을 도입, 국제상거래와 관련해 외국공무원에게 뇌물을 약속 공여하거나 공여의사를 표시한 경우 5년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부패라운드’는 당장 현실로 다가왔다. 더이상 “선물은 한국의 관행”이라는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이에 따라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무엇보다 부정부패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의 도입이 중요하다”며 부패방지법 등 법령정비 주장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이들은 공직자윤리와 돈세탁방지, 내부고발자보호 등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반부패기본법안을 확대해 입법과 사법부 대기업 등 모든 주체들에 적용할 수 있는 법안을 요구하고 있다.
반부패국민연대의 경우 부패에 연루된 기업에는 입찰참여배제 등 불이익을 주는 한편 ‘반부패기업’은 독려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동시에 각종 거래계약시 뇌물 상납 향응제공 등 부패가 발생할 경우 이의 100배에 달하는 금액을 추징토록 하는 ‘청렴의무준수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했다.
기업들 스스로의 자정노력도 중요하다. 최근 코오롱 그룹에서 △어떤 향응과 금품, 편의제공도 거부한다 △어떤 비용도 변칙처리하지 않는다 △모든 협력업체에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윤리강령’을 채택한 것이 좋은 예다. 이와함께 기업들이 이른바 ‘한국적 관행’을 버리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인정(人情)이 아닌 제품의 품질과 기업의 투명성을 통해 경쟁하는 문화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김상훈기자〉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