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우먼, 당당한 여성, 세련미와 능력을 겸비한 여자….
결혼보다 일을 우선시하고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늘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자’를 뜻하는 386세대의 미혼여성인 ‘386처녀’. 대중화된 대학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활발한 사회진출로 남녀평등을 실천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결혼은 여전히 넘기 힘든 벽이다. 바쁜 20대를 지나 30대에 이르러서야 결혼을 생각하지만 이들을 반기는 ‘적당한 남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능력있는 386처녀의 눈높이에 맞는 남성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결혼시장에서 능력있는 여자보다 젊고 예쁜 여자가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이같은 결혼시장의 수급 불균형 때문에 386처녀의 절반 이상이 적당한 배우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게 결혼정보회사들의 지적이다.
여권(女權)과 능력은 얻었지만 결혼시장에서는 냉대받는 386처녀들의 실상을 살펴본다》
▼신소외계층, 386처녀▼
“친구들이 연애하며 놀 때 난 열심히 공부한 ‘죄’밖에 없는데….”
서울 명문여대의 박사 출신인 K씨(34·전임강사)는 지난달 초 모결혼정보회사에 회원등록을 하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33세가 넘으면 미혼 남성들이 거의 찾지 않기 때문에 재혼남성과의 맞선도 감수해야 한다”는 상담원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 지난해까지는 34세가 제한연령이었는데 결혼시장의 수급 불균형이 갈수록 심해져 올해부터 33세로 낮췄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K씨는 외모 학벌 직업 집안환경 등 나이를 제외한 평가항목에서 모두 ‘A’를 받았다. K씨가 남자였다면 당연히 최고의 신랑감인 셈.
“남자는 나이가 많더라도 능력만 있으면 되지만 여자는 나이의 벽을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우리 결혼시장의 현실이다. 386처녀 4명중 2,3명은 마땅한 배우자 찾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결혼정보회사 ㈜에코러스의 지영수기획실장)
결혼정보회사 ㈜선우가 지난해 9월 35세 이상의 미혼남성 300명을 대상으로 이상적인 배우자상을 조사한 결과 절반(49%)이 ‘나이는 어릴수록, 외모는 예쁠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능력있는 21세기형 여성을 원한다’는 응답은 20%에 불과했다.
“20대에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러나 30세가 넘으면서 불효녀로 전락했다. 단지 결혼을 안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명절때 고향에 내려가기도 꺼리게 됐다.”(35세 간호사)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서울지역 여성회원 중 학벌 직업 등 나이를 제외한 모든 평가항목에서 ‘A’를 받은 VIP회원 251명 중 무려 61%(152명)가 386처녀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咸仁姬)교수는 “우리나라는 남편이 부인보다 나아야 한다는 앙혼(仰婚)관습이 뿌리깊은 데다 결혼에 대한 압력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다”고 말했다.
이런 결혼문화 때문에 능력있는 386처녀들이 배우자를 만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것.
▼386처녀의 사회적 배경▼
“80년대 학번은 졸업정원제 등으로 여성이 대중화된 대학교육을 받은 첫 세대다. 여권(女權)의식이 높아졌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크게 늘었다. 결혼을 선택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됐다.”(36세 미혼녀인 관광회사 간부 K씨)
5년마다 실시하는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30∼39세의 미혼여성은 70년 2만8301명, 80년 5만4399명, 90년 18만6045명, 95년 24만7586명 등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30대 여성 중 미혼녀의 비중도 70년 1.0%에서 95년 5.0%로 급증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80∼90년의 증가세는 베이비붐세대(55∼63년생)의 전반적인 인구폭증에 힘입은 바 크지만 90년 이후의 증가세는 386처녀의 본격적인 등장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90∼95년 서울지역의 여성 인구동향은 386처녀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잘 보여준다. 95년 서울지역 31∼35세의 총여성인구는 46만8708명으로 90년(53만6002명)보다 6만7000여명이나 적었다. 그러나 미혼여성수는 90년(4만3426명)보다 오히려 9000여명 많은 5만2498명.
“27, 28세 때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그렇지 않으면 독신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40세를 앞둔 요즘 많이 흔들린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고 매일 자문한다.”(37세 미혼녀인 번역가 L씨)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교수는 “오늘날 30대는 기존 결혼제도를 수용하느니 차라리 독신을 택하겠다는 의식을 가진 첫 세대다. 그러나 독신녀를 위한 사회적 여건은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화지체현상의 피해자▼
K대 국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H씨(33·여)는 최근 남동생의 결혼식에 일부러 지각했다. 친지들의 민망한 눈길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 “2세를 위해서라도 35세 전에 결혼하고 싶지만 쉽지않을 것 같다. 얼마전 석사출신 남자와의 맞선도 ‘여자가 박사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요즘 결혼의 현실과 교수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선우 이웅진사장은 “386처녀의 소외감은 농촌총각 문제처럼 이미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사장은 “여성의 능력과 권리의식은 많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결혼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이뤄진다. 중매는 사라지고 연애결혼이 판을 치지만 386처녀는 여전히 수동적이다. 직장에서는 여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여성학자들은 386처녀들이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면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혼자 살기에는 상당한 용기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김현미박사는 “경제적 풍요와 자유연애로 상징되는 커리어우먼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여성의 일은 아직도 권력과 부의 주변부에 있으며 현실적으로 직업적 성취도 쉽지않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많은 여성이 고달픈 삶의 대안으로 결혼을 선택하지만 이미 ‘혼기(婚期)’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듀오의 서현주관리팀장은 “386처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를 주도하는 ‘여성문화의 개척자’이지만 결혼시장에서는 전통적인 관습에 의해 피해를 보고 있는 ‘문화적 과도기의 희생양’이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윤종구기자(jkmas@donga.com) 이철용기자(lyc@donga.com)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