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기술자’ 이근안씨의 예기치 못한 자수의 이면에 어떤 사연과 속셈이 숨어 있는지는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드러난 바가 없다. 그가 우리 사회의 비극적 아이러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씨는 “국민의 세금을 받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고 말한다. 대공수사 요원으로서 필설로 이루 다할 수없이 흉악한 고문을 자행했지만, 국가는 이것을 ‘국가안보 수호에 기여한 공’으로 인정해 수많은 표창을 주었다.
당시의 법률에 따르더라도 고문은 명백한 범죄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에게 고문이라는 불법행위를 자행해 ‘간첩’과 ‘반국가사범’을 제조해냄으로써 ‘국가안보’를 지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이것이 우리가 지난날 숱하게 목격했고 아직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첫번째 아이러니다.
11년 동안 국민에게 공개된 이씨의 사진은 딱 하나뿐이었다. 수배전단 사진은 어느 민완기자가 동사무소 주민등록표에서 도둑질한 특종사진이었다. 최초 수배전단을 만들고 현상금을 내건 것도 경찰이 아니라 ‘민가협’이었다. 시늉에 그친 경찰 수사는 ‘가재는 게 편’임을 새삼스레 증명했을 뿐이다. 반인륜적 범죄자를 응징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들이 도둑질이라는 범죄와 현상수배라는 ‘월권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기관이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자기네 식구를 감싸고도는 자유민주주의 사회! 이것이 이근안씨가 깨우쳐 주는 두번째 아이러니다.
“민주화가 되면 너희들이 나를 고문해라.”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지만 지금 고문을 겁낼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잔혹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반 쪽 짜리에 불과하다.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등 ‘고전적 좌익사건’에서는 물론이요, 5·18 당시 구속된 수천 명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비롯해 반제동맹당 사건과 서노련 등 80년대 모든 굵직굵직한 시국사건 관련자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신체적 정신적 불구가 된 사람도 많다. 고문 범죄자를 고문하지는 않는다고 민주사회인 건 아니다. 고문조작의 진상과 책임자를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해야 제대로 된 민주사회이다. 고문 사실과 범죄자는 있으되 진상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없는 민주주의! 이것이 세 번째 아이러니다.
검찰은 이씨의 도피 행적과 고문 배후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이씨와 함께 일했던 전직 경관들은 그가 사람을 잡아오거나 심문할 때 반드시 상부에 사전 사후 보고를 했다고 증언했다. 이씨의 자수로 한나라당 ‘DJ 저격수’ 정형근 의원의 정치적 몰락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항간의 관측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정의원이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이었던 80년대 중반 이씨가 안기부 파견근무를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말 걱정스러운 일이다. 만약 정의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 한나라당이 ‘야당 죽이기 음모’를 비난하면서 ‘민주주의 수호 투쟁’을 벌일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미리 못박아 두자. 반인륜적 고문범죄에 가담한 자는 누구든 준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정의원과 같은 야당의 ‘반정부투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정부와 여야당은 모든 고문의혹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를 배상하는 특별법을 제정해 부끄러운 ‘이근안 아이러니’를 근본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유시민〈시사평론가〉denkma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