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집단으로 훈장을 반납했다. 자랑스러운 가보(家寶)를 청와대로 우송해 버렸다고 한다. 이들의 항변은 두가지다. “친일파의 자손은 대대로 잘 사는데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 뿐”이라는 것이 그 하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 하다가 꼭 죽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냐”는 두번째 항변은 들어주기에 어렵지 않아 보인다.
▽73년 개정된 독립유공자에 관한 법률은 8·15광복 당시까지 살아 있었던 애국지사의 경우 연금수혜를 2대후손까지로 제한했다. 8·15이전에 사망한 독립운동가에게는 3대까지 연금을 주도록 한 것과 차등을 둔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한 애국지사들을 더 대우해주기 위한 취지였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살아남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연금혜택을 받지 못한다며 훈장을 반납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의 계보는 대략 3가지로 나누어진다. 무장투쟁파, 선전외교파, 무실역행(務實力行)파가 그것이다. 홍범도(洪範圖)이청천(李靑天)장군 등이 이끌던 독립군과 광복군이 무장투쟁 노선을 주도했다. 여기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선전외교파로는 이승만(李承晩) 김규식(金奎植)선생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그리고 주로 국내에서 장기적으로 실력을 쌓은 뒤 민족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무실역행파의 주장이었다. 교육과 언론 창달을 강조한 안창호(安昌浩)선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크게 보면 세가지의 독립운동 방법은 모두 그 나름대로 공헌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노선에 따라 교육수준과 사회적 능력에 차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또 광복후까지 살아남은 무장투쟁파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 노선이 이렇게 다양한 만큼 목숨을 잃었느냐, 부상만 당했느냐는 구분만으로 그 정신을 기리는 기준을 삼아서는 곤란할 것 같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