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별세한 김자경(金慈璟)씨는 해방 후 한국 오페라의 산 증인이자 영원한 프리마돈나였다. 그의 삶 또한 한편의 오페라처럼 드라마틱했다.
지난해 8월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열린 ‘한강사랑음악회’. 갈채 속에 등장한 그는 이수인곡 ‘별’을 부르던 중 호흡이 가빠 노래를 중단했다. 힘없이 무대를 내려온 그는 즉시 앓아누웠다.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가 급속히 삶을 소진시켜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김씨는 지난달 25일 상태가 급속히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는 한때 의식을 회복하는 등 소생의 기미를 보였으나 결국 숙원인 ‘김자경 예술학교’의 설립을 보지 못한 채 긴 ‘인생 오페라’의 막을 내리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1917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유년시절 노래에 소질을 발휘, 동아일보에 음악신동으로 소개되기도했다. 이화여전에 피아노과로 입학했지만 음악 전부문에 재능을 발휘해 성악과 졸업 자격까지 따낸 그는 결국 48년 ‘춘희’공연으로 한국 최초의 프리마돈나가 되면서 한국 오페라역사와 끊지 못할 인연을 맺었다.
화가인 부군 심형구(沈亨求)화백과의 로맨스도 유명한 일화. 심씨는 본처와 별거중이던 사실을 숨긴 채 김씨와 결혼했지만 최상의 외조(外助)로 그의 음악활동을 뒷받침했다.
그는 62년 남편이 심장마비로 작고, 한때 상심에 빠졌으나 ‘꿈에서 남편의 격려를 듣고’ 심기일전,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 그는 그 후 ‘나이는 28세’ ‘남편은 오씨(氏)성 오페라’라고 말하며 오페라 발전에 온갖 열정을 바쳤다.
그는 오페라단 활동과 함께 후진 양성에도 적극적이어서 83년 이화여대를 정년퇴임할 때까지 소프라노 이규도(李揆道) 송광선(宋光善), 메조소프라노 김학남(金學男) 등을 길러냈다.
91년 김자경오페라단에 사재를 털어 넣고 사단법인체로 재출범시킨 그는 민간오페라단이 난립하면서 재정난으로 부동산을 매각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매년 1,2회씩 오페라 상연을 멈추지 않았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