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사설]금융계좌 마구 뒤지지 말라

입력 | 1999-11-10 19:58:00


금융감독원 집계에 따르면 김영삼(金泳三)정부 말기인 97년 9만6000여건이던 금융계좌 추적건수가 작년엔 13만9000여건으로 늘고 올해는 8월까지만도 12만8000여건에 이른다. 월평균으로 따져 2년사이 두배로 폭증한 것이다. 더구나 올해의 경우 수사기관이 영장을 제시한 계좌추적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금융감독원 세무관서 등이 영장 없이 ‘협조요청’만으로 실시한 계좌추적이었다.

또 계좌추적의 목적과 범위 등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포괄적으로 정보제공을 요구하는 행태가 일반화돼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계좌추적 대상자의 금융거래정보뿐만 아니라 제3자의 신상 및 거래정보까지 무더기로 유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다.거래정보를 제공한 금융기관들도 이 사실을 10일 이내에 당사자인 고객에게 통보할 의무를 거의 지키지 않고 있다.

계좌추적권의 오남용은 우선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다. 또 정부기관이 행정편의주의에 빠져 계좌를 마구 뒤지면 금융거래와 합법적이고 정당한 경제활동까지 위축될 우려가 높다. 금융거래의 위축은 기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의 악화로 이어진다. 법적 근거가 명확한 최소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금융거래의 비밀을 보장하도록 법률에 명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계좌추적의 급증으로 범죄수사의 효율을 높이는 긍정적 측면보다 기본권 침해 및 경제활동 위축 등 부정적 측면이 더 클 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계좌추적권이 과거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되는 사례까지 나타날 경우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깊어지고 결과적으로 집권측이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최근 법무부는 수사상 필요한 계좌추적이라도 보강증거 수집차원의 최소한 실시를 원칙으로 하며, 추적범위도 대상자 명의계좌와 그 계좌에 연결되는 직전직후 계좌로 한정하고, 추가 추적이 필요할 경우 압수수색영장을 다시 청구토록 검찰에 지시했다. 이같은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검찰 뿐만 아니라 계좌추적권을 갖고 있는 다른 행정기관에도 준용돼야 한다. 법원도 영장발부를 훨씬 엄격히 해야 할 것이다.

정부기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계좌추적 절차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도 있다. 계좌를 추적한 뒤에는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통보해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정부는 도청 감청과 함께 계좌추적권을 마구잡이로 남용해 ‘비민주적 감시꾼 정부’라는 오명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