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원(徐敬元) 전의원 밀입북사건은 88년 8월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서전의원이 북한을 다녀온 사건을 말한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은 서의원을 간첩혐의로 조사, 기소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관련 여부도 조사했었다. 이 과정에서 조사의 핵심은 서의원이 북한으로부터 받아 온 공작금 5만달러중 1만달러를 김총재가 서의원으로부터 받았는지 여부였다. 검찰은 91년 5월 이 부분에 대해 공소를 취소했다. 그러나 최근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이에 대해 국민회의가 정의원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함으로써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것. 사건 당시 당사자들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들어본다.》
◇"DJ가 徐씨 자수시키라 지시"◇
▼당시 평민당원내총무 김원기씨▼
‘서경원 전의원 밀입북’사건의 본질은 그 개인의 실정법 위반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盧泰愚)정권은 여소야대 정국과 5공청산을 주도하고 있던 평민당 김대중(金大中)총재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사실에 대한 왜곡과 날조를 통해 정국 반전용 공안사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길재의원으로부터 서경원 전의원의 방북사실을 전해듣고 곧장 김대중총재에게 보고했다. 김총재는 “기막힌 사건”이라며 서의원을 자수시키라고 했다.
박세직안기부장의 공관으로 서의원을 데리고 가 방북경위를 설명하자 박부장은 “이렇게 자수시켜준 데 대해 김총재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달라”면서 “현역의원이고 자수했으므로 불구속 수사하겠다”고 했다.
당시 서의원은 전셋집을 구할 돈이 없어 국회 의원회관에서 숙식하다시피 했는데 그런 서의원이 김총재에게 1만달러를 줬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김총재는 또한 ‘색깔론’에 시달리면서 칼날 위를 걷듯 조심할 때였기 때문에 북한 공작금 1만달러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조작치고는 아주 유치한 조작이다.
◇"예민한 문제…기록이 말해줄 뿐"◇
▼당시 수사검사 이상형·안강민씨▼
당시 수사라인은 김기춘(金淇春·현 한나라당 의원)검찰총장―김경회(金慶會·현 형사정책연구원장)서울지검장―김기수(金起秀·현 변호사)서울지검 1차장―안강민(安剛民)서울지검 공안1부장이었다. 그러나 수사는 안부장이 검찰총장에게 직보(直報)하는 체제여서 김지검장과 김차장은 수사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에는 공안1부 검사 전원이 투입됐으며 주임검사는 이상형(李相亨·현 경주지청장)검사였다. 또 자금추적 등이 필요하다고 해서 특수부 검사들도 일부 투입됐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의원은 15일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에 모든 것이 나와 있어 이것을 보면 알 것”이라면서 “만약 법원의 판결이 잘못됐다면 재심을 청구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총재와 서경원 전의원에 대한 조사를 맡았던 이상형지청장도 이날 전화통화에서 “이 사건 재조사에 대해 나는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 “검사는 기록으로 말할 뿐”이라고 입을 다물었다.
안강민전 부장도 “너무 예민한 문제라서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며 접촉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법조인들이 수사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해 수사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안기부 DJ관련 거짓진술 강요"◇
▼당시 평민당대외국장 이길재씨▼
서경원(徐敬元)전의원이 평양에 다녀온 것은 88년인데 그것을 알게 된 것은 89년 6월이다. 당시 서전의원으로부터 “평양 갔다 왔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김원기(金元基)원내총무에게 이를 알렸다.
김총무는 당시 박세직(朴世直)안기부장을 만나서 서전의원의 문제를 상의했는데 양자간에 서전의원을 불구속기소하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고 들었다.
6월29일인가 서전의원을 채가고 나도 곧바로 7월2일 기관에 끌려갔다. 안기부 등에서 서전의원의 자복을 받아 당시 김대중(金大中)총재를 엮으려고 하는데, 서전의원 혼자의 주장으로는 부족하니까 나를 증인으로 세우려고 했던 것같다.
그런데 내가 그 시나리오에 동의를 해주지 않으니까 한달간 갖은 수모를 주더라. 당시 안기부는 나에게 “김총재가 서의원을 밀입북시킨 것 아니냐” “북한에 다녀온 이후 다 보고를 받은 것 아니냐” “돈도 받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집중 추궁했다. 당시는 89년 4월에 문익환(文益煥)목사 방북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동생인 문동환(文東煥)의원이 평민당 소속인 관계로, 평민당이 곤혹스런 점이 없지 않던 상황이다. 그런데 서전의원 방북사건이 터지니까 당국이 이를 공안정국으로 몰고가려 했던 것이다.
◇"안기부서 1만달러 보고 안받아"◇
▼당시 안기부장 박세직씨▼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자민련 박세직(朴世直)의원은 서경원전의원에 대한 안기부 조사과정에서“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방북 사실은 언제 알았나.
“김원기전의원이 ‘할 말이 있다’는 전화를 해 안기부장 공관으로 오라고 했고 공관에서 그로부터 서전의원의 방북 사실을 들었다. 내가 서전의원을 만나지는 않았다.”
―그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1만달러 수수 사실을 들었나.
“공관에서 만날 때 돈 얘기는 일절 없었다. 안기부 1차 조사에서도 5만달러 수수 사실만 밝혀졌고 1만달러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1만달러 수수 의혹은 언제 알게 됐나.
“나중에 검찰조사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 모양인데 나는 잘 모르겠다.”
―안기부 조사에서 정형근(鄭亨根)의원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실무 책임자였다. 그러나 내 재임중에는 (가혹행위 등)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송인수기자〉issong@donga.com
◇"89년2월 이길재씨에 訪北밝혀"◇
▼당시 평민당의원 서경원씨▼
서경원 전의원은 “89년 당시 평민당 김대중(金大中)총재에게 1만달러를 줬다고 진술한 것은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검찰에서는 왜 김총재에게 1만달러를 줬다고 진술했나.
“보름동안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강압수사를 했다. 수갑과 포승으로 묶은채 엎드려뻗치기를 시키고,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위협하면서 1만달러를 준 사실을 실토하라는데 어떻게 버티나.”
―김대중총재에게 미리 방북사실을 보고했나.
“절대 그런 일이 없다. 안기부에 출두하기 이틀쯤 전인 89년 6월22일경에 김원기(金元基) 당시 원내총무에게 보고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89년 2월 총재를 모시고 해외순방에 나섰을 때 스웨덴에서 이길재(李吉載)대외협력위원장과 술을 마시다가 자랑삼아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은 고문사실을 부인하고 있는데….
“당시 안기부에서 정의원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런 고문을 당했다. 피를 세사발이나 토했다.”
〈공종식기자〉kong@donga.com
◇"1만달러 수수는 검찰이 밝힌것"◇
▼당시 안기부대공국장 정형근씨▼
89년 6월24일 당시 박세직(朴世直)안기부장의 공관에서 박부장으로부터 서경원의원의 방북 사실에 대해 들었다. 박부장은 “불순한 목적은 없고 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서 북한과 씨앗교류를 위해 갔는데 평민당에선 현역 의원이 북한에 다녀온 것이어서 서둘러 협의를 해 왔다”며 “빨리 처리하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그래서 다음날 저녁 서의원을 만나 안가에서 조사했다. 서의원은 유럽의 북한 공작총책인 성낙영에게 85년에 포섭돼 그 루트로 올라갔으며 김일성과 허담(許錟)을 만나 5만달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박부장은 간단하게 생각했다가 이런 내용이 나오자 수습이 안되겠구나 싶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안기부는 당시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서의원의 밀입북 사건을 보고받고 즉시 자수토록 조치한 것으로 알고 수사를 완료해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뒤이은 검찰수사에서 김총재가 이미 두달전에 서의원의 밀입북 사실을 알았고 88년 9월에 공작금 5만달러중 1만달러를 수수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정연욱기자〉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