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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담론]관념의 옷을 벗겨라, 육체는 아름답다

입력 | 1999-11-15 20:04:00


고행을 통해 몸에 쌓인 업(業)을 덜어내고 덜어내다가 해탈을 위해 몸 자체를 포기하기까지 한다는 인도의 자이나교.

불교나 기독교 등 대다수 종교의 금욕적 수련도 ‘몸’의 욕망과의 정면 대결을 기본으로 한다. 수천년간 욕망의 덩어리라는 ‘육체의 감옥’을 탈출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집요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이 몸에 대한 규율과 통제의 미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몸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통해 생명의 힘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이미 몸은 새로운 세기를 맞고 있었다. 사람들은 온몸을 친친 감았던 관념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던지며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이크 타이슨, 신디 크로퍼드, 키아누 리브스 등 당당하게 ‘몸’을 무기 삼아 스타덤에 오른 인물은 수없이 많다.

▽‘몸’의 도전〓우아한 곡선에 싸인 고대 그리스의 비너스상, 치밀한 분석을 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정신적 고뇌를 육체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인류는 육체를 욕망의 근원이라고 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몸’을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가꾸며 표현해 왔다.

성욕 뿐 아니라 식욕과 나태와 물질적 허영 등 온갖 욕망 담지자로서의 몸에 대한 통제와 이에 대한 인간의 ‘항전’은 인류역사의 주요한 갈등이었다. 그런데 근래의 몸 담론은 몸의 욕망에 대한 통제완화 요구 단계를 넘어 근대 이래 ‘이성’이 구성했던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부정을 시도한다.

▽‘몸’을 통한 연대〓하지만 이런 몸의 도전은 오랜 기간 대다수 인류를 억압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40년대에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정신이 구성한 이론적 세계보다 몸이 체험하는 구체적 세계에 주목할 것을 주장하며 “‘몸’이 세계에 거주한다”고 선언했을 때 비로소 데카르트 이래 천대받아 온 ‘몸’은 후원자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백인 문화의 보편성을 강요하는 서구중심주의를 비난하는 문화다원주의, 몸의 감각과 감성을 불신하는 이성중심주의를 공격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성으로 계량화한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간주하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생태주의, 남성의 ‘폭력적 이성’으로 여성의 감성을 억압하는 남성중심주의를 경멸하는 페미니즘, 정신 대 육체 또는 자연 대 인간 식의 이원주의의 편협성을 비판하고 유기체적 자연관의 회복을 주장하는 현대동양철학. 근대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사상계의 담론을 주도하는 이런 사상조류는 자연스럽게 ‘몸’을 중심으로 연대한다.

▽욕망 가득한 인간의 기우〓이제 인간은 이성적 사고의 ‘단순성’과 ‘폭력성’을 넘어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며 몸을 통해 느끼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욕망과 관심들을 존중하려 한다. ‘몸’의 담론은 관념의 허상을 걷어내고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인식을 통해 현실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처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짝 늘어진 귓불, 풍만한 유방, 도톰한 입술 등 생식기능과는 관계없이 과잉 발달한 성감대들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든 성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은 몸에 대한 관심을 성적 욕망에 대한 과도한 긍정으로 끌고가곤 한다. 물론 성적 욕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벗겨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이 도리어 성적 욕망의 추구로 인해 억압된다면 성적 욕망은 사회의 감독을 피할 길이 없다.

김형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