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12월16일. 일단의 장관급 인사 부인들이 커피숍에서 만나 온갖 수다를 만발하다가 검찰총장부인이 입은 수박색 패션이 화제에 올랐다.
‘색깔이 좋다’ ‘디자인이 세련됐다’ ‘고급스럽다’ 이런 말이 오간 끝에 어느 장관부인이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다. 총장부인은 앙드레김 의상실에서 세일때 샀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이들은 관용차를 타고 그 의상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늘 하던 대로 옆동네의 고급의상실에도 들렀다. 거기서 총장부인은 고급 코트를 한벌 샀다. 쇼핑을 마친 이들은 세종문화회관으로 몰려가 나훈아 쇼를 관람했다.
삼류 스토리를 연상케하는 이 줄거리는 바로 석달전 국회 옷로비 의혹사건 청문회 증언에서 드러난 고관부인들의 하루 나들이다.
그리고 그후. 라스포사가 쇼핑의 주무대가 되고 그 과정에서 총장부인이 구입한 2400만원짜리 옷값을 재벌부인에게 대신 내도록 요구했다는 것이 바로 옷로비의혹사건의 대강 줄거리다.
흘러간 이야기를 새삼스레 끄집어 내는 것은 고관부인들의 ‘화려한 외출’이 특별검사의 도마에 다시 올라 재구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보면 세간의 소문내용은 거의 다 맞았다. 청문회장에서 부인들이 성경에 손을 얹고 보여준 기상천외한 거짓말이 그렇고 수천만원짜리 옷을 사고 이런 사실을 숨기려고 장부가 조작되고 여기에 검찰의 압력이 동원되고. 국민이 ‘뻔할 뻔자’라고 했던 내용들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특검의 실체규명 작업이 물론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특검이라고 해서 특별히 유리한 수사풍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장신청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검찰의 냉소적 반응과 또 다른 방해세력의 역풍이 벌써부터 거세게 불어 온다.
검찰은 17일에도 특검의 영장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특검수사가 어떤 의도를 갖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문했다.
솔직히 말해 검찰의 이런 자세는 대단히 실망스럽다. 검찰이 말하는 ‘의도’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올해 잇달아 터진 대전법조비리사건과 심재륜고검장 항명파동, 진형구 폭탄주파동 등 이른바 ‘검찰대란’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국민을 우롱하기는 언론문건 사건도 마찬가지다. 권력의 도덕성이 걸린 언론장악의 실체는 슬그머니 밀려나고 청와대수석을 지낸 한 인사의 명예훼손이 사건의 본질로 변질된 지금 항간에선 또다른 괴소문들이 무성하다.
검찰은 최선을 다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검찰의 판단은 그리 중요치 않다.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조직구성원과 국민이 보기에 이상하면 언젠가는 문제가 다시 생긴다.
법질서의 중심에 있는 검찰권력의 동요와 일그러진 행태를 보면서 도대체 우리에게 국가권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새삼스레 되묻게 된다.
우리가 억울할 때 검찰로 달려가는 것은 엄정하고 공평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그게 사회적 합의다. 위로 가면 그래도 억울한 사정을 들어줄 것이란 간절한 기대가 우리에겐 있었다.
이런 신뢰체계가 이제는 산산이 부서졌다. 검찰과 경찰을 찾는 것이 해결의 시작이 아닌 고통의 시발이란 인식이 퍼져있고 법집행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이 극단화하는 경향마저 엿보인다.
그래도 한가닥 희망은 특별검사다.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고 해서 득의만만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잠시 참아주기 바란다.
영장기각으로 사실관계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검에서 장부조작을 밝혀내고 검찰이 압력을 행사한 것은 진실규명에 중요하고도 분명한 단서가 아닐수 없다. 특검의 실패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실패로 귀착된다. 특검을 방해하는 ‘얼굴없는 자’들의 어떤 책동도 경계한다.
이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