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손으로 남편에게 첩실(妾室)을 골라주는 여자. 아이가 생기고 남편이 딴살림을 나자, 새 가족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그 여자, 필례. 몸은 멀어졌지만 필례에 대한 찰진 정을 끊지 못해 애를 끓이는 남자, 도철….
이경자(51)의 새 장편소설 ‘정(情)은 늙지도 않아’의 주인공들이다. ‘절반의 실패’ ‘혼자 눈뜨는 아침’ ‘황홀한 반란’ 등 이전 작품에 나타나는 폭압적 가장(家長)상, 그 질곡에서 탈출해 ‘홀로서기’를 꿈꾸는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는 독자는 혹 없을까.
“작가의 목소리가 직접 드러나는 소설은 이제 그만이에요. 찬찬히 읽다 보면 주인공의 인생을 경험한 것 같은, 사람 살이가 묻어나는 작품을 쓸 작정입니다.”
새 장편이 그렇다. 작가는 남녀의 인연, 세월 속에 녹아내리는 애증, 세상살이의 질곡을 잔잔하고도 질박하게 그려낸다.
“도철은 자손을 위해 첩인 영실에게 명당자리를 마련하지만 자신은 죽어 필례 옆에 묻히기를 소망하죠. 정이란 그런게 아닐 까요. 사람따라 늙어가지도 않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작가는 “요즘 세대의 사랑은 편의 위주다. 찰지고 속깊은 정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라며 세태의 얄팍함을 꼬집었다.
“지난해 내놓은 ‘사랑과 상처’에서 남녀갈등의 씨앗까지 모두 파헤쳐 보았다고 생각해요. 그것으로 일단 그 문제에서는 관심이 비켜났습니다.”
작가는 ‘사랑과 상처’에 이어 새 작품에서도 고향인 강원도 양양 지역의 푸근한 사투리, 그 생생한 입말을 맛깔나게 살리고 있다.
그는 “내 정서의 뿌리는 대청봉 낙산사 설악산 동해, 그 눈 시린 장관(壯觀)들”이라며 “앞으로 나올 작품에서도 유년기의 체험과 인상이 짙게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이당 266쪽 8000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