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만 지나면 역사적인 2000년을 맞는다. 새 밀레니엄의 첫날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1900년대를 마감하고 2000년 단위의 시대로 들어서는 길목은 과거를 회상해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계기가 된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국가 차원에서 새 밀레니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세기적 기념물을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새 밀레니엄 맞이 분위기는 조촐할 정도로 조용한 것 같다. 국가 위상으로 본다면 거창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법 하지만 미국 사회는 2000년이란 시작 자체에 둔감한 것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미국이 새 밀레니엄의 도래를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백악관에 대통령 직속의 ‘밀레니엄 위원회’를 두고 있다. 이 위원회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전자우편으로 문의해 보았다. 예산은 600만달러이고 그 중 절반은 지방단체나 민간단체 등에서 지역별로 기념행사를 한다고 하면 심사해 5000달러까지 보조금을 준다고 한다. 나머지로 전국적인 단체나 워싱턴시에서 연초에 개최되는 기념전시회 음악회 등에 재정지원을 한다.
미국은 올해 1500억달러의 국고수입 흑자를 본데다 실업률이 계속 떨어지는 등 앞으로도 당분간 경제호황이 지속될 전망이다. 초강대국인 미국에서 새 밀레니엄 기념사업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외계의 생명체 탐사를 위한 초대형 우주선 발사계획을 공표하는 등 우쭐거리는 위세를 과시할 법도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없다.
역사가 짧은 나라여서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사회가 각계 각층의 단체, 직업별 조직, 민간기구, 기업별로 진로를 새롭게 모색하는 움직임이 조용하면서도 바쁘게 진행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기업들은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인수합병을 계속하고 다른 기관들도 Y2K 문제해결 등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언론도 정보화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미국의 새 밀레니엄 맞이 태도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요란한 구호를 외치기보다 확고한 방향을 설정한 뒤 한걸음 한걸음 착실하게 일을 추진하고 있다.
대중매체들이 독자와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해 새 밀레니엄 프로그램을 연재하는 등 법석을 떨고 있지만 상업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있을 밀레니엄 전야제도 올해는 규모를 조금 늘렸을 뿐 연례행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의 새 밀레니엄 행사계획이 유난히 조용해 보이는 것은 아마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인 것 같다. 외환위기를 간신히 넘긴 나라에서 새 천년을 맞는 기념행사가 왜 그렇게 많고 사치스러운지 조금 당황스럽다.
희망을 북돋우기 위해 축제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 행사가 국고보조에 의존하는 것은 문제다. 국민의 혈세를 일과성 행사에 펑펑 써도 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앞으로 100년 동안 ‘평화의 열두대문’을 건립한다는데 대문이 없어서 한국사회가 평화롭지 못했는가.
실속없는 행사보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기업경쟁력 강화 등 한국사회가 발전방향을 올바로 설정할 수 있도록 새 밀레니엄 맞이를 내실있게 추진하기 바란다.
이재원〈미국 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