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온 사람에겐 삶이 벌을 준다.” 1989년 10월 당시 동베를린을 방문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몰려든 대중에게 한 말이다. 개방과 개혁을 촉구한 고르바초프의 이 말은 이미 불길이 솟고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한달 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그러나 막상 발언 당사자인 고르바초프 역시 너무 늦게 왔었는지도 모른다.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는 부메랑이 되어 소련의 해체를 불렀고 대통령이던 고르바초프는 그후 세계무대 전면에서 퇴출당하는 처지가 됐으니까.다 거기서 거기…10년이 지나 한 세기가 끝나가는 요즘 우리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온통 ‘너무 늦게 온 사람들’ 투성이인 듯싶다. ‘옷로비 의혹’이며 ‘언론장악 음모 의혹’이며 그 돌아가는 모습이나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그들이 변화하는 세상, 적어도 이만큼은 달라져야 한다는 시대의 묵시적 공감대마저 외면하고 마냥 늑장을 부리고 있는 꼴이다. 그들의 삶이 벌을 줄지 안줄지는 당장의 관심사가 아니다. 문제는 ‘너무 늦게 온 그들’로 인해 국정이 온통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들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애꿎은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고관대작 부인네들’의 한심한 짓거리와 그걸 덮으려고 애쓴 ‘힘깨나 쓰는 자들’, 자기 사무실로 온 언론대책 문건을 ‘보지도 읽지도 못했다는’ 여당 실력자나 폭로를 해놓고도 국정조사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야당의원도 ‘힘없는 백성’이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인데 아무래도 그들만이 그걸 모르는 모양이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처구니없기로는 북한에 밀입북했다가 간첩죄로 구속돼 8년여간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서경원(徐敬元)전의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사흘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밀입북을 ‘통일을 위한 방북’으로 규정하고 당시 북에서 받은 ‘공작금’은 ‘통일운동자금’이라고 내세웠다. 말인즉슨 “88년 8월 농민운동의 일환으로 방북해 통일문제를 협의하고, 북한의 허담(許錟)에게 통일운동비 10만달러를 요구해 5만달러를 받고 영수증까지 써주었으나 당시 수사기관이 협의를 지령수수, 방북을 밀입북, 통일운동자금을 공작금 등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89년 당시 안기부와 검찰의 고문으로 사실이 왜곡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됐기 때문에 대법원의 확정판결도 무효라는 주장이다.
‘서경원 사건’이 다시 불거지게된 사연은 생략하자. 다만 지금의‘서경원 사건’은 그가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당했고, 고문에 의한 진술로 현 김대중대통령의 명예가 훼손당했다는데 그 사실 여부를 밝혀보자는 것이다. 이미 10년이 지나 끝난 사건을 다시 뒤지는 것은 고작 ‘누구 죽이기냐’는 야당 반발이나 사기 십상이고 아무래도 ‘긁어 부스럼’이라는 여권 내부의 걱정도 있다지만 그거야 애초 시작한 쪽의 ‘정치적 부담’일테고, 기왕에 고문에 관한 수사가 시작됐으면 그걸 다시‘정치적으로’ 유야무야할 수는 없는 일이다.할말을 잃을 지경고문은 더이상 이땅에서 재연돼서는 안될 ‘악몽’이어야 한다. 고문이란 반문명적 범죄조차 근절시키지 못하는 어떤 체제, 어떤 권력도 더이상은 존립할 수 없다. 10년전의 고문이라 하더라도 그 진상을 밝혀내고 책임을 묻는 일은 그래서 적당히 넘어갈 수 없다.
그러나 서경원씨의 경우 비록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해서 명백히 실정법을 어긴 자신의 방북행위마저 호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로서는 말그대로 ‘순수한 통일에의 열망’이고 받은 돈도 ‘영수증을 써줬으니’ 당당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기야 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할 리가 만무하니 더욱 기가 막힌다. 하물며 집권여당의 어느 지구당에서 서씨를 당원교육에 강사로 불렀다는데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80년대 중반 대학 운동권에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약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커녕 부자(父子)가 권력을 세습하는 ‘반봉건적 전제국가’에 불과한 북한정권에 대한 ‘미몽’이 깨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그런 북한정권과 ‘통일문제를 협의’하고 ‘통일운동비’를 받은 것을 이제껏 ‘자랑스레’ 말한다면 서씨는 ‘늦게 와도 정말 너무 늦게 온 사람’이다.
전진우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