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비디오예술의 정치철학을 위하여 텔레비전을 지독히 학대한 예술가이지만 텔레비전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작가이기도 하다. 그 결과 백남준의 최대 출세작이 바로 텔레비전을 홀대한 작품과 널리 홍보한 작품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자의 경우는 비디오예술의 효시를 이룬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며 후자는 인공위성 프로젝트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예술의 미학적 최고가치를 ‘소통으로서의 예술’과 ‘인간화 된 예술’에 두었던 백남준에게 텔레비전에 대한 애증은 이처럼 남다른 것이었다. 하여, 때로는 텔레비전을 비인간적이고 탈 자연적인 상징물로 간주하고 가차없이 냉대하다가도 세계인을 하나로 엮어주는 텔레비전의 정보 중개자역할에 대해서는 가득한 미소로 맞이하였다.
특히 후자는 평소 그의 통신기술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기술습득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인공위성을 통한 대륙에서 대륙으로의 생중계는 비디오예술을 시작하던 초기시대부터 실현시켜보고 싶었던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 기회는 1984년이 되어서야 겨우 실행되었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구촌을 하나의 정보 울타리로 설정하는 개념은 매우 낯선 생각이었다.
1984년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인류의 위기를 예언한 중요한 해였다. 때문에 그가 위기의 주제로 삼은 ‘빅 브라더’의 통제수단인 텔레비전을 심각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때였다. 텔레비전을 무기로 삼아 유명 예술가가 된 백남준에게는 이때가 누구보다도 호기였다. 매스미디어가 인류를 그들의 종속적 지배하에 둘 것이라는 오웰의 주장과는 달리, 또 인류가 1984년을 기점으로 매체에 의하여 정복당할 것이라던 오웰주의자들의 주장을 뒤집고 오히려 텔레비전을 통하여 세상이 지구촌으로 바뀐 생생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텔레비전의 기막힌 정보중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우선 인공위성을 이용한 대륙간의 문화적 이벤트를 생각하였다.
1983년 8월. 백남준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할 것으로 믿었던 존 케이지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당신과 조셉 보이즈가 미국과 유럽 양 대륙을 사이에 두고 인공위성 중계를 통하여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이 있겠습니까. 이는 가령 시몬느 드 보봐르와 노먼 메일러가 실존적 문제를 놓고 벌이는 인공위성 대담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양 대륙사이에 하늘이 가로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고작 몇 백 명을 앞에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 공연물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간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동구권의 수 백만 명의 사람들에게까지 희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케이지는 백남준이 뭔가 예술적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그런데 백남준이 케이지를 찾아온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오웰이 예고한 1984년이 바로 내년인데 인공위험 프로젝트를 준비하려다보니 나에게는 무일푼입니다. 조셉 보이지를 비롯하여 우리 주변 사람들이 판화라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면 이 행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협조해주리라 믿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인공위성 프로젝트에서 프로그램 디렉터였던 미국의 캐롤 브란덴버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서는 다짜고짜로 하는 말이 내년 1월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 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 날을 기념하는 텔레비전 쇼를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지요.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의 채널 3번 텔레비전과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낙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었죠.”
전문방송인인 캐롤 브란덴버그가 없었더라면 물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백남준의 취지를 알아들은 그녀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적절히 섞을 수 있는 새해 첫 아침 방송프로그램을 하나씩 엮어나갔다. 이브 몽땅과 로리 앤더슨 데이비드 보위 등 대중적 스타들을 섭외 하였으며 돈 안들이고도 초빙이 가능한 백남준의 친지들을 하나씩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다. 보이즈, 케이지, 긴즈버그, 머스 커닝햄, 조지 플림튼, 벤 보티에, 피터 가브리엘을 섭외 하는데 성공하였다.
1984년 1월1일, 드디어 파리의 텔레비젼 FR3와 뉴욕의 공영방송 WNET가주조정실을 성치하여 신 구대륙을 연결하는 생방송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방영하였다. 뉴욕에서는 조지 플림튼이, 파리에서는 자크 빌레가 사회를 맡았다. 이 생방송은 한국과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중계되었다. 현장 출연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비디오테이프가 오버랩되며 방영되었다.
언론은 백남준의 지구촌 정보잔치에 찬사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방송이 처음 시작되자 7%의 시청률이 기록되었다.
거금 40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이 가운데 17만 달러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과 국립예술진흥기금 등에서, 그리고 7만 달러는 백남준을 비롯하여 케이지, 보이즈, 커닝햄, 긴즈버그 등 친지들이 합동으로 제작한 판화 판매대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텔레비전 방송사도 일부 협찬에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남준은 이때 진 빚으로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하였다.
이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