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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홍준형/국가정보가 유출되는 나라

입력 | 1999-11-25 18:51:00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 새 천년으로 가는 마지막 겨울의 하늘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 뒤죽박죽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지 알 수가 없다. 거짓은 사람들을 오도한다. 그러나 거짓말 보다 더 해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의 혼돈이다. 그 해악은 진실이 규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확산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진실과 허위의 너무 잦은 반전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정부와 정치를 불신하고 권력을 조롱하게 될 것이다.

▼혼란 주역은 권력기관▼

연일 새로운 사실과 문건이 폭로되는 가운데 청와대와 집권당의 간부, 여야 국회의원, 검찰, 경찰과 국정원의 전현직 간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치열한 정보전을 벌이고 있다. 정보대란이다. 적 앞에서 내부사정을 위장 교란시키기 위해 무슨 심리전이라도 벌이는 것인가. 옷 로비 사건 언론대책 문건 사건, 국가정보기관의 정보유출 의혹, DJ 1만달러 수수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이 일련의 사건들과 여야간의 이전투구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기가 막힌다.

진실과 허위의 혼돈을 초래한 장본인은 바로 사실을 조사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국가기관, 그리고 그 기관과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었던 인사들이다. 전직 국가정보원장의 정보유출 의혹과 그에 대한 국정원의 태도, 언론대책문건 도난사건에 대한 정부와 검찰의 조처, 안기부간부였던 야당 국회의원의 언론대책문건 폭로와 그 정보수집조직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고위공직자들이 공직을 통해 얻은 정보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국가기관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옷로비관련 조사보고서가 공개되면서 그것이 바로 옷로비의혹의 주된 당사자로부터 나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의혹이 불거지자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태정씨는 특별검사팀에 자진출두해 전통일부장관 부인 배정숙씨에게 전달된 문제의 문건을 자신이 부인 연정희씨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충격을 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으로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조직의 장래와 전직 검찰총장의 신분’을 내세워 문건의 출처를 함구했기 때문이다. 공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리혐의를 받은 당사자에게 어떤 경위든 그 조사결과에 관한 문건이 제공되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를 다루는 국가기관이나 수사기관의 고위간부들이 정보를 은폐 조작하거나 남용할 때 생기는 폐해는 민주적 기본질서 자체를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 ‘나라를 위해 입을 다물도록’ 종용해 정보를 왜곡시키거나, 자신의 이익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정보를 제한 차단하는 행위, 공적 정보를 사물처럼 전용하고 빼돌리는 행위, 이런 행위들은 그 해악성이 반역행위에 못지 않다.

▼이익위해 정보 남용▼

그동안 공직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정보를 남용하거나 왜곡하더라도,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거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더욱이 드러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자행되는 정보의 남용과 왜곡행위는 그것을 통제할 마땅한 법적 수단조차 없는 상태에서 쉽사리 법망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됐던 것은 주로 ‘나중에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서였다.

단적인 예가 ‘DJ 1만달러 수수혐의’ 재조사이다.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였던 ‘공작금수수의혹’ 사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 현재의 검찰이 옳다면, 당시 검찰은 ‘DJ 1만달러 수수’의 사실여부를 가름해줄 중요한 부분을 누락시킨 것이 된다. 서경원 전의원이 밀입북해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 5만달러를 ‘통일운동 자금’ 운운하는 것은 국기를 뒤흔드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증거도 없이 간첩공작금의 일부를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당시 야당지도자를 최대의 정치적 곤경에 빠뜨렸던 행위는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다시 보자. 고위공직자가 내사자료를 부인에게 건네주는 식으로 국가의 조직과 정보를 사적으로 이용해도 무방한가. 사실을 조사하고 정보를 취급하는 임무를 띈 국가기관에 종사하거나 종사했던 자들이 제지받지 않고 정보를 왜곡 남용 은폐할 수 있는 나라, 하물며 그것을 용인하는 정부에게 희망은 없다.

홍준형(서울대 행정대학원교수·공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