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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 요리사로 '제2인생'

입력 | 1999-11-25 18:51:00


“나 머리 안 했다면 주방장이 됐을 거에요. 요리가 훨씬 더 재밌어요.”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67)가 하는 말은 뜻밖이다. 단발머리 잘자르기로 유명한, 70년대 미국 보그지에 국내 미용인 최초로 소개된 우리나라 미용계의 선구자. 액세서리를 전혀 안 할 정도로 치장에는 관심이 없는 그이지만 먹는 데만은 돈을 안 아낀다. “먹는 것에 일생 모은 돈을 다 넣었다”고 할 만큼.

그의 식도락(食道樂)은 60년 세월을 지나왔다. 어릴 적부터 미식가인 아버지를 따라 맛있는 음식점을 순례했고 5남매중 유독 그만 ‘부엌에서 살았다’. 전 부치는 것, 닭 잡아 손질하는 것, 다 재미있었다.

“그동안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안 먹어본 음식이 없어요. 순대 맛만 모르고 다 알아요. 겨울 일본요리로는 대구고니가 제일이예요. 우리나라식으로 전 부쳐 먹지 말고 고니에 참기름만 발라 그냥 구워서 폰즈소스에 찍어먹으면 정말 맛있죠.”

서울 정동극장 옆의 추어탕,마포시장 안 연탄불에 구워먹는 돼지고기, 힐튼호텔 일폰테의 피자…. 맛있는 음식은 머릿속에 죄다 입력돼있고 어느 식당 주방장이 새로 왔는지까지도 안다.

한식 양식 일식 중식 가리지 않는 그의 매서운 입맛은 일류 주방장들도 인정한다. “레몬향 때문에 음식맛이 죽네요” “생선 잡은 지 한시간밖에 안됐군요” 하면 깜짝 놀라 음식을 새로 내오게 마련.

그런 그가 평생 생각해온 ‘창작 요리’들을 모아 두달전 아예 음식점을 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그레이스 리 미용실 1층의 계절음식전문점 ‘시즌스’(02―517―0905). “나 맛있는 거 해먹자고 차린” 음식점을 그는 ‘나의 놀이터’라고 부르며 즐거워한다.

“계절따라 그 계절에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나라엔 단 하나밖에 없는 음식들이죠. 생소한 음식이라 반응이 극과 극이긴 하지만 손님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면 희열을 느껴요.”

게를 넣어 삶은 다시마 물에 튀긴 찹쌀떡을 넣고 ‘가을의 맛’ 은행과 풋고추로 맛을 낸 것, 밀전병을 얇게 부치고 명란젓 삶은감자 치즈를 얹어 피자같이 만든 것, 철판에 살짝 눌러 만든 밥을 김 위에 놓은 뒤 우니(성게알)와 실파를 얹어 말아먹는 것….

주로 일본음식에서 힌트를 얻어 요기도 되면서 ‘술을 부르는’ 안주도 되는 미효(美肴)를 30여가지 개발했다. ‘명란치즈감자’ ‘토마토가지베이컨’ ‘우니환타지’ ‘시즌스국밥’ 등 이름만으로는 잘 알 수 없고 말로는 맛을 설명하기도 어려운 희한한 음식들이다. 1만원 안팎. 그와 함께 요리를 만들어낸 주방장 남경표씨(30)는 “모든 음식의 맛을 알고 있는 이런 분은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르고.

지금 그의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김장김치로 어떻게 맛있는 겨울요리를 만들어낼까’이다. 주방장 옷을 입으면 늘 신나고 자랑스럽다.

“음식은 나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줬고 나를 즐겁게 해줬어요. 내 삶은 헤어디자인과 음식 두 가지로 이루어진 거지요.”

〈윤경은기자〉key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