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꼭 시간이떨어지는것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시집 ‘그리운 102’(문학과 지성사)에서
이 시를 읽다보니 갑자기 은행나무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려보고 싶어진다. 어떤 기다림이었기에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마음이 들까. 내 삶속에 그대가 걸어들어오는 그 한 순간, 그 아름다운 한 순간. 빗방울이 곧 시간으로 변하고 기다리는 내가 한 장의 은행잎으로 변하는 순간에 시인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를 만난다. 은행잎보다 더 작은 우리들,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를 만난다.
신경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