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며 상처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매일 밥을 먹으며 살지만 실은 상처의 밥과 국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상처의 밥과 국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상처 또한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증오하면 고통만 커져▼
상처는 친밀함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친하고 가까운 사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아내는 남편한테 남편은 아내한테, 어머니는 아들한테 아들은 어머니한테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받는다. 오늘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 바로 그 상처에서 오는 고통의 독소 때문이다. 독소에서 오는 고통을 부여안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치게 되는 것이 생이다.
나도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깜박 잊고 있다가도 어느 한 순간 상처의 불길이 다시 활활 타올라 몸과 마음을 태운다. 참으로 고통스럽다.
과연 상처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최근 ‘바오로 딸’출판사에서 나온 ‘상처와 용서’라는 책을 마치 성서처럼 몇번이고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은 비록 작은 문고판이었지만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데 무엇보다 크고 값진 책이었다. 예수회 송봉모 신부가 쓴 그 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서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용서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 의지의 행위이며, 용서한다고 일단 의지를 세우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한다. 그 결단의 뒤에 오는 문제, 용서하겠다고 의지를 세우고 입 밖으로 용서한다고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 자꾸 또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므로 그것은 신의 몫으로 맡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 자신이 용서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누구를 용서하겠다는 의지의 마음을 세워본 적이 없다. 내게 상처준 자들을 증오하고 징벌하기만 했지 그들을 용서하겠다고 구체적으로 결단을 내려본 일이 없다. 내가 그러했으니 내게 상처를 받은 이들 또한 나를 용서했을까.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성적 지식의 습득물일 뿐 그것이 진정 어떠한 것인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대체내가 나 자신을 왜 어떻게용서한다는 말인가.
▼가장 소중한 건 자신▼
다행히 ‘상처와 용서’에서 송신부는 스승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삶을 비교함으로써 왜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스승 예수를 배반한 사실은 둘다 똑같으나 삶의 결과가 천국과 지옥만큼 다른 것은 바로 자신을 용서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나무에 목매어 자살해버렸고,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기 때문에 순교를 통해 스승과 교회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곧 20세기가 저물어가게 될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시간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만 초발심, 즉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다가올 21세기는 참으로 소중하다. 21세기에 나 자신을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남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나 자신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고통스러운 내 삶의 상처가 더 이상 썩어가게 방치해 둘 수는 없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나에게 상처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고 싶다.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