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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한인섭/검찰 개혁안은 왜 빠졌나

입력 | 1999-12-01 19:19:00


반년의 활동 끝에 사법개혁추진위원회(사개위)의 ‘사법개혁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초 터져나온 법조비리와 정치검찰의 시대, 옷로비와 파업유도의 오점을 청산하고 21세기 선진사법의 시대를 열어갈 청사진을 사법개혁안이 담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부정적이다. 부분적인 개혁은 있으나 근본 쟁점들은 법조와 법무부 중심의 논리에 밀려 방어적 대안 내지 현상유지에 머무른 감이 있다.

▼사법개혁안에 실망▼

사실 사개위를 구성할 때부터 지금의 결과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전문성과 중립성을 갖춘 인사로 구성하겠다고 했으나, 법무부가 사실상 구성을 주도해 개혁대상이어야 할 법조계가 위원의 주류를 이루었다. 몇몇 뜻있는 문제 제기도 현실론의 두터운 벽을 뚫지 못했다. 논의과정을 밀실화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검찰의 정치의 중립성과 신뢰성 확보는 국민적 염원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옷로비 특별검사의 활동으로 사적 연줄망의 폐해, 월권과 과잉충성의 형적, 도처에서 축소와 은폐 의혹이 드러났다. 사소하다는 옷로비 의혹조차 이 지경으로 처리했다면 보다 민감한 사안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를 누가 납득하겠는가.

사개위 개혁안에는 ‘검찰개혁’이 없다. 특별검사제에 대해서는 기존 검찰의 철지난 반대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구태의연한 법무행정을 혁신할 방안은 검토되지도 않았다. 사개위의 출범계기가 검찰문제였는데 제대로 된 대안이 없음을 어떻게 변명할까.

법조인 양성제도의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개혁이 돼야 하는가. 사법시험 응시자격 제한은 공감할 수 있다. 물론 법과대학의 질을 올리기 위한 기준을 제시하고 평가를 정례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될 것을 조건으로 하고 말이다.

문제는 ‘한국사법대학원’을 제도화하자는 발상이다. 사법시험 합격자에게 사법연수원 대신 국립사법대학원을 신설해 여기서 학문과 실무를 겸한 공통연수를 2년간 실시하고 1년간 직역별 분리연수를 한다는 안이다. 언뜻 보면 사법연수원 교육의 충실화를 위해 연수기간을 늘리겠다니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함직하다. 그러나 사시 합격생을 대상으로 단일 국가기관에서 집체적 교육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현재의 사법연수원조차도 획일적 관료적 양성기관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국과 유사한 일본의 사법연수소도 시대착오적이라고 해 연수기간을 줄여가고 있으며 폐지론도 거세다. 미래의 법조인이 전문화 다양화 개방화의 시대에 맞는 전문인이어야 한다면, 법조인교육도 획일화 관료화 국가화의 방식을 탈피해 다양화 민영화 탈국가화의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

▼특권화 용납못해▼

사법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세기 동안 우리 사법은 근대의 껍데기만 빌려왔을 뿐, 사법의 주체문제를 의도적으로 빠뜨렸다. 입법 행정에선 그래도 국민주권이 제도화돼 있건만 사법에서 국민은 오직 수사받고 재판받는 객체일 뿐이었다. 이같이 시민 소외의 틀을 만들어놓고 법조인들이 담합해 초과이윤을 누리는 구조가 정착됐다.

이 시점에서 개혁안을 제기한다면 납세자이자 주권자인 국민을 중심에 놓는 안이어야 한다. 관료사법의 원형을 제공했던 일본은 검찰의 수사결과를 시민이 심사하는 제도를 반세기 동안 운영했고 지금은 국민이 재판에 참가하는 배심제와 참심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이 재판의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검찰수사를 심사하며, 경찰의 권력남용을 막을 수 있는 참여사법이 제도화돼야 할 시점이다. 사개위 안에는 ‘국민’이 없다.

국민의 섬세한 눈은 더 이상 사법의 독점과 특권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법조비리, 검찰권 남용, 법조 이기주의의 문제현실을 개혁하고자 모였는데 개혁대상 기관과 집단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미봉적 성과로 그친 현실이 슬플 뿐이다. 그런 기관과 집단에 기대어 권력유지를 꾀한 정치집단들도 최근 옷로비 사건에서 각성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후진적 특권적 사법구조를 유지시켜 주는 대가로 사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는 사법과 정치가 공멸한다는 교훈을 말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법개혁은 시작되지 않았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사법의 명제는 다음 밀레니엄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가.

한인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