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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이규민/네모 그릇에 둥근 뚜껑

입력 | 1999-12-08 18:45:00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조정의 잘못된 경제정책을 네모난 그릇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것에 비유했다. 뚜껑을 덮는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뚜껑이 네군데 모서리에만 얹혀 있으니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 요즘 총선을 앞둔 정부의 갖가지 경제정책들이 매양 그런 모양들이라 여간 위태해 보이질 않는다.

지난주에 있었던 휘발유값 인하가 한 사례에 해당된다. 국제유가가 폭등하고 있는 터에 정유사들의 ‘자발적 인하’소식이 나오자 소비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업계는 “가격을 민간이 자율결정토록 해놓고 인상요인이 발생했는데 거꾸로 내리라는 데 기가 막혔다”고 정부를 원망했다. 인하부담이 내년 총선이후 어떤 형태로든 소비자가에 반영될 것이고 보면 국민은 지금 조롱당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자동차 문제도 그렇다.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커진다고 해당업체가 스스로 문을 닫았는데 몇달 지나 정부가 나서서 다시 가동토록 했다. 명분은 가동하고 있어야 매각협상에서 유리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정부는 왜 그렇게 간단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재가동 석달동안 매달 2000대씩 생산한다지만 첫달 500여대밖에 안 팔렸으니 그에 따른 부담이 다시 지역으로 역류해 경제가 나빠질 때 정부는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내년도 예산안에도 총선을 앞 둔 선심보따리가 곳곳에 숨어있다는 기획예산처 실무자의 귀띔을 들을 때, 그리고 한계에 다다른 저금리정책을 정부가 고집하는 것이 내년 선거와 무관치 않다는 통화당국자의 근심어린 말을 들을 때 이런 유의 일들이 경제전반에 폭넓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정치학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펼쳐지는 이런 종류의 왜곡된 경제정책을 가장 교활한 선거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서고금 어느나라 정부도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처럼 선거후 뒷감당을 하기 벅찰 정도로 이를 즐긴 나라가 또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국민이 뒤집어 써야 할 그 후유증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물가문제다. 물가인상요인들이 선거날까지 눌려 있다가 용수철 튀듯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 여기서 비롯된 이른바 물가의 상승 타성이 정책선택의 폭을 좁힌다는 사실을 정부는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다. 물가 때문에 임금이 뛰고 그래서 산업경쟁력이 떨어지면 남는 것이 실업사태라는 것은 상식중에도 기본에 속하는 것이다. 총선에서 어느 한쪽의 빛나는 승리를 위해 다시 많은 근로자가 거리로 내몰린다면 그건 우리 모두의 손실이다.

경제구조의 왜곡현상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선거로 인해 정책선택의 우선 순위가 바뀌면 그 결과를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은 보통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말만 무성하다가 뒷전으로 밀려 있는 각종 경제개혁 법안들이 그렇고, 표를 많이 갖고 있는 경제주체 쪽 편을 들다가 표류하고 있는 노사정간의 현안들도 그렇다.

흥미로운 것은 총선후 2년뒤에 바로 대통령선거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번 총선을 위해 정부가 득표용 경제정책을 쓴다면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은 대선전 고작 1년 남짓에 불과하다. 한번 엉클어진 경제가 그렇게 짧은 기간안에 고쳐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네모난 그릇에 둥근 뚜껑을 고집한 결과가 총선보다 더 중요한 대선에서 정부 여당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닐까.

이규민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