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과 따로 살며 다섯살 연상의 남편과 해로하시는 나의 어머니의 춘추는 향년 일흔 넷. 그런데 최근 이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이혼을 고려중에 있어 우리 가족은 온통 초비상이다.
문제의 발단은 옛날 보통학교 중퇴의 학력이지만 지금까지도 독서광이며 서예 애호가인 어머니가 구입한 휴대전화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퇴직후 아예 책을 놓고 노인정 등에서 소일하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서예모임 도서관 강좌 등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어머니는 젊은 동료 여성들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의 편리한 기능에 맘이 끌렸었나 보다.
▼아버지와 의견대립▼
‘나만 휴대전화가 없다’는 푸념이 급기야는 이 땅에 그 흔한 또 하나의 무선통신 가입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적어도 노인정파(老人亭派)인 아버지의 관점으로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곧 눈에 흙 들어갈 나이에 주책’이라는 의견에 노인정 친구들까지 가세했다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힐난 또한 대단했었나 보다. 정보 소통의 순발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어머니는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옛날 노인네’와 그만 결별할 것을 요구했다. 나이가 많이 든 남자인 나의 아버지는 그래서 요즈음이 위기다.
사십 중반 이후의 내 또래 조금 나이든 남자들도 컴퓨터 세대인 20,30대 남자들로부터 무언가 끊임없이 치받치는 위기를 느끼며 살고 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살아온 젊은 날의 감각과 감성을 지식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추며 변화시키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상대적 자부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은 젊은 시절에 요즘 20,30대 남자들처럼 나약하지 않았고 책임감도 강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자부심인 ‘왕년(往年)의 사상’을 풀어보면 이렇다. “요즈음 젊은 남자애들은 유약하고 무책임하다. 열이면 열 결혼상대로 맞벌이 여성을 원하는 점이 그렇다. 또 집에서 육아에 종사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도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으로서의 역할 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인가. 얼마전에는 남자가 파출부까지 하겠다고 당당하게 TV 프로그램에 등장한 일도 있었다. 반면 우리 세대는 왕년에 가부장으로서 책임을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고 지켰다.”
이 주장에는 시대변화의 도도한 흐름을 못 읽은 지나간 남자들의 맹점이 숨겨져 있다.
▼수평-균점사회 진일보▼
맞벌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무책임하고 나약하다는 요즈음 젊은 남자들의 생각을 뒤집어보면 의외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가부장 권력사회에서 모든 생산은 남성들의 독차지였다. 남자가 생산을 독점했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약자인 여성은 강제로 가사에 떼밀린 채 가부장의 보호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반면 젊은 남자들이 맞벌이를 원한다는 것은 여성과 함께 일자리를 나누어 갖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수직과 독점의 사회에서 수평과 균점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회로 진일보하겠다는 뜻이다. 어차피 한정된 일자리를 나누어 갖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가부장으로서의 권력을 포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남자만 가장의 고통스러운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기도 하고 여자도 때에 따라서 가장이 될 수 있다는 평등적 남녀관계의 변화를 예고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육아에 종사하는 남편의 등장과 남자 파출부의 등장은 오히려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밝은 일면을 일깨워준다. 결론은 슬기롭게 변화하는 우리 젊은 남자들의 생각을 요즈음 나이든 남자들이 쉽게 폄훼해 버렸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나의 아버지의 불만도 이런 변화가 두려운 한 나이 많이 먹은 남자의 몽니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같은 ‘젊은 남자애들’에 대한 편견과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변함없이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끈질긴 몽니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휴대전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