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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최규철/'소비자 정치'

입력 | 1999-12-14 19:39:00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올해처럼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개혁정책의 혼선과 부진 때문이다. 현정권이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이 바로 개혁작업인데 왜 그런 것일까. 집권세력에서는 개혁부진의 이유가 야당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 반개혁세력의 저항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줄 안다. 그러나 큰 착각이다. 더 큰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따로 국밥'▼

국민에게 물어보라. 금융분야, 기업구조조정, 노사관계, 공공부문의 4대개혁은, 그리고 정치개혁은 어떤지를 물어보라. 우선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또 개혁을 하긴 하는 것 같지만 결정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는 대답도 나올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국민은 감옥에 간 사람들이 유난히 많고 여러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현정권 개혁2년의 얼굴이다. 안간힘을 써왔는데도 잘 몰라준다며 집권세력으로서는 혀를 찰 일이라 하겠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민이 몰라 주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개혁정책이 너무 자주 흔들린데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고치려고 너무 크게 판을 벌였다. 역대 정권마다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결과는 어떠했는가. 현정권이 또다시 개혁을 들고 나온 것은 성과가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지난 정권과 달리하지 않으면 현정권도 비슷한 시행착오를 범하고 만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정보지식산업사회에서 정치지도자들은 하루에, 아니 시간마다 얼마나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직관인가, 신념인가. 그래서인가, 세제개혁후퇴 공기업구조조정부진 관치금융재발 등으로 지금 개혁정책은 뜯었다 붙였다한 판잣집 모습이다.

결론은 이렇다. 국민과 개혁이 동떨어진 이유는 정책결정 때 여론을 세밀하게 살피지 않은데 있다. 정치지도자들이 자신의 직관과 신념만 믿고 밀어붙이려다 여론의 저항이 크거나 내년 총선을 의식해 우물쭈물 해버린 결과다. 게다가 옛방식 그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한데 묶은 후 거창한 구호로 포장까지 했다. ‘4대개혁’이니 ‘제2건국’이니 하는 무거운 말을 국민은 어떻게 소화하란 말인가. 개혁의 필수요건인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끌어내려는 겸손한 노력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군림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개혁따로 국민따로 ‘따로국밥’이다.

미국 백악관엔 상근 여론정치분석 전문가가 있다. 각종 정책수립 때는 물론 매일 여론의 흐름을 추적, 정책을 보완하고 대응전략을 세운다. 95년 미행정부 잠정폐쇄사건 때 클린턴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의식변화를 추적하면서 이를 십분 활용했다. 공화당은 그전해 중간선거에서 의회를 장악한 여세를 몰아 민주당 행정부의 예산안처리를 저지했었다. 예산이 집행되지 않으면서 행정부기능이 마비됐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작은 정부’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장담했다. 그러나 다음해 총선에서 호응은 예상 밖으로 저조했다. 미국민은 행정부 폐쇄를 작은 정부이념의 실현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연결시켰다. 사회보장지급이 늦어졌고 국책은행이 문을 닫았고 항공기운항이 지연됐으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던 불편을 잊지 않았다. 미국 유권자들은 여야의 진보, 보수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 가치에 가장 가까운 정책을 제시한 정당에 표를 던졌다. 미정가에선 정책 제시(Issue/Attributes)→유권자혜택(Issue/Voter Benefits)→유권자목표달성(Personal Consequences)→유권자가치실현(Personal Values)이란 득표전략모델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정책제시로 끝나지 않고 그 정책이 유권자의 이익에 어떻게 부응해 나갈 수 있는지를 단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는‘메시지 발전전략’이다. 이 땅 정치인들에게도 연구를 권하고 싶다.

▼"나를 따르라" 안통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니 나를 따르라”는 가부장(家父長)적 리더십이나 거창한 구호정치는 이제 안 통한다. 그보다는 매일 민심의 흐름을 읽고, 또 민심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호소하는 여론추적 노력이 중요해졌다. 본격적인 ‘정치 시장조사’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정치도 ‘이념적 정치’에서 ‘소비자 정치’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개혁정책의 실마리도 여기에 있다.

최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