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세가지 획기적 발견이 있었다.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양자 가설을 제창했고,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출판했으며, 미국 생물학자 자크 롭은 환경을 조작해 성게를 수정케 했다. 1년 뒤, 마르코니는 대서양을 건너 무선전신을 수신했고, 1903년 라이트형제는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뉴턴 역학을 대체한 양자물리학의 초석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합리적인 활동이 무의식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롭의 실험은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생명의 신비에 과학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마르코니와 라이트형제의 개가는 20세기 기술문명의 서곡이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과학자들은 소립자와 우주의 근원을 파헤치고 있고, 포유류 복제에 성공한 뒤 인간복제를 꿈꾸고 있다. 인간의 뇌신경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실험이 진행 중이며, 인간 게놈계획은 인간 유전자의 완벽한 해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화성에 우주선을 보냈고, 전화만큼 널리 쓰이게 된 컴퓨터를 인터넷이라는 범세계 통신망이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 20세기 과학의 발전과 변화의 특징을 네 가지로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는 실험실 과학에서 거대 과학(big science)으로의 변화다. 둘째, 위용있는 물리학에서 실용성 강한 생명과학으로 무게 중심 이동이다. 셋째, 절대적 객관적 진리에서 상대적으로 확실한 지식 추구로의 변화다. 넷째, 독자적인 과학자 사회에서 과학에 대한 공중의 개입으로 변화한 것이다.
20세기 과학기술의 분수령은 2차대전이었다. 2차대전은 “레이더에 의해 승리하고 원자탄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 정도로 과학기술 전쟁이었다. 레이더와 원자탄은 물리학자, 수학자, 기술자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세계대전-냉전과정 국가 기술개발 경쟁▼
전쟁 이전에는 대학이나 사립재단과 기업이 과학 연구를 조금씩 지원했고, 결과적으로 과학 연구의 규모가 작은 실험실 차원이었다. 그러나 레이더와 원자탄의 위용은 각국 정부로 하여금 거의 무제한으로 과학을 지원하게 만들었다. 과학 연구는 장기적으로 실용적인 기술을 낳고, 그 기술은 곧 국력이 된다는 주장이 곧바로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거대 과학의 탄생은 냉전에 의해 가속되었다. 원폭에 이어 미국과 소련은 수소폭탄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고, 컴퓨터 정찰위성 레이저 모뎀과 같은 전자 장비, 아르파넷과 같은 통신 네트워크 등이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적국에 대한 우위와 실용적인 이유를 내세워서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가속기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이론입자물리학과 거대 가속기는 ‘쿼크’와 같은 근본입자의 존재를 규명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은 이런 거대 연구의 효능에 회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는 1993년 미국 의회가 물리학자들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던 초전도수퍼가속기(SSC) 개발 예산을 취소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20세기 생물학은 유전자와 유전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신비가 유전자의 암호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를 규명하기 위해 물리학과 화학의 방법을 사용해서 생명현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유전자가 핵의 DNA에 있다는 것이 오랜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밝혀졌으며, 그 이중나선의 구조가 1953년 왓슨과 크릭에 의해 규명되었다. 곧이어 크릭은 DNA의 염기가 RNA를 매개로 단백질을 합성한다는 ‘중심 도그마’라는 가설을 제창했다. 1960년대 초엽에는 이 단백질 합성의 ‘암호’가 해독되었다.
이런 규명을 바탕으로 1970년대 초엽에는 원하는 유전자를 자르고 복제해서 다른 DNA에 붙일 수 있는 유전자 재조합법이 발견되었고, 이를 사용해서 기름을 먹는 박테리아나 하버드쥐와 같은 새로운 생물이 만들어 졌다. 이런 발전은 1990년, 30억개나 되는 인간 DNA의 염기 배열과 10만개 정도로 추산되는 유전자를 전부 규명하는 ‘인간 게놈계획’이라는 또 다른 거대과학을 출범시켰다.
지금 생물학자들은 포유류를 복제하고, 복제 지식을 이용해서 노화와 인공장기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는 물리학의 위용에 가려있던 생물학이 ‘과학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과학의 본질에 대해, 과학과 사회의 관련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생겼다. 1920년대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을 경험 명제 위에 논리적으로 세워진 객관적, 보편적 진리의 집으로 파악했다.
이들의 주장은 20세기 전반에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1962년 출판된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 의해 강력하게 비판됐다. 쿤은 과학사의 사례를 바탕으로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에 마치 종교의 개종(改宗)과 같은 요소가 개입함을 설득력있게 보여주었고, 과학의 발전을 진리의 고지를 향해 점증적으로 나아가는 행진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쿤의 저작은 과학과 사회, 문화의 관계를 상호침투하는 관계로 새롭게 보게 했으며, 이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과학의 지식에 사회가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구성주의 과학학의 모태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자들과 과학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믿는 과학자들 사이에 ‘과학전쟁’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기도 했다. 과학을 사회, 문화의 일부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2차대전 당시 과학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의 바니버 부시는 1945년에 출간된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라는 책에서 정부가 장기적인 과학연구를 지원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렇지만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것은 전문과학자로 구성된 재단이었다. 과학이 정부에 의해, 즉 시민의 세금에 의해 지원되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나 시민의 개입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부시의 생각이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전후 과학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다.
▼核등 부메랑 우려 시민개입 두드러져▼
그러나 1960년대부터 화학물질에 의한 환경오염, 과학의 군사화, 시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추진된 핵발전소와 같은 프로젝트, 생명공학의 잠재적 위험, 공공지식이어야 할 과학지식의 사유화와 같은 현상이 드러났다. 이 모습은 과학자와 시민에게 과학 연구가 과학자들의 판단에만 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확산시켰다.
시민들은 전문분야를 잘 알기 때문에 신뢰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책임을 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과학기술자를 원했다. 1990년대에 들어 과학자들이 부쩍 책임이나 신뢰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과학이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과학의 이러한 경향들을 고려해 보면, 21세기 과학연구의 정당성은 진리나 장기적 효용과 같은 막연한 가치가 아니라 과학자 사회 밖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원천에서 찾아질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문화적 가치와 더 조화를 이루는 과학연구에 더 많은 사회적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렇게 찾아진 정당성은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크되고 주시될 것이다.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과학기술사)
《다음 회는 ‘종교’로 필자는 장석만(張錫萬·종교학박사) 한국종교연구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