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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호인수/예수가 사람에게 다가왔듯이

입력 | 1999-12-19 18:47:00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여행 중이던 나는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시애틀 중심지는 데모 때문에 통행이 금지된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앉아 혹시나 하고 TV를 켰더니 아니나 다를까 화면 가득히 데모 현장이 나타났다. 데모의 양상은 거기도 별수없이 우리 나라와 비슷했다. 나는 전에 데모의 현장을 지켜보거나 참여한 적이 여러번 있었으니 신기할 게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꽤나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힘있는 자'에 산교훈▼

여행의 피곤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깜박 잠이 들어 아마 한시간도 훨씬 넘게 잠을 잤던 것 같다. 잠에서 깬 내 눈앞에 TV는 켜진 채 그대로였는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화면이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고 여전히 데모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방송국은 여타의 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WTO 반대 데모만을 하루 온종일 생방송했던 것이다. 그 방송이 공중파였는지 유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다음날도 전날처럼 똑같은 생방송을 계속했다.

그 덕에 미국 시민들은 가만히 앉아서도 누가 왜 데모를 하는지,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서 굳이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데모대나 경찰이나 시위와 저지의 방법은 평화적인지 혹은 폭력적인지, 그 와중에 누가 몽둥이를 휘두르고 기물을 파괴하는지 등을 직접 보고 알게 되는 거였다.

언론이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데모 현장을 집집의 안방으로 옮겨줌으로써 보고 판단할 여건이나 능력이 안되는 국민에게 철저히 봉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국 시민들이 한없이 부러워졌다. 우리는그렇게할 수 없을까? 1980년 5월의 광주나 87년 6월 항쟁, 그 후에 계속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시위 등이 미국처럼 TV에 중계 방송되었더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인 손해와 불행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들은 그 시간에 연속극이나 재방송하고 있었다. 방송국이 시민들의 안방을 찾지 않고 청와대 대문 안쪽이나 기웃거렸던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성탄절이 다가온다. 예수라는 한 인물의 출생을 기독교인들은 신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함께 계신 사건이라고 믿는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이 될 수는 없으니 함께 있기가 원이라면 방법은 오직 하나, 전능한 신쪽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이 되는 길밖에는 없지 않은가. 신이 인간을 위해서 해낸 가장 감격스러운 일이다.

▼베푸는 성탄 됐으면▼

다시 말해서 예수의 탄생은 능력과 권한이 큰 편에서 그렇지 못한 편으로 두팔 벌리고 다가가 끌어안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역사는 지금껏 2000번의 성탄절을 지내면서도 이와 같은 성탄의 참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불행한 일이다.

새 세기, 새 천년에는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로 달려가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먼저 대통령이 일반 시민들에게 다가가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 서민들은 청와대 현관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으니까 서로 어울리려면 대통령쪽에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거다. 성탄절에 대통령이 장기수가 갇혀 있는 감옥에 찾아가서 따뜻이 위로하며 양심수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내 힘 다하겠노라고 다짐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그 다음은 언론 권력이다. 신문과 방송이 갖고 있는 막강한 힘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누구에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공부할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안되나? 그걸 바라는 것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르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철없는 짓인가.

2000년 1월1일 새벽에 우리 나라의 동쪽 끝 독도에 가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한 세기의 첫해를 본들 그날부터 세상이 달라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새 세기, 새 천년에는 신이 눈부시게 폼나는(?) 특권을 다 내동댕이치고 사람에게로 온(필립비 2장 7절) 예수 탄생 사건을 이땅에 되살리자. 그것만이 새 세기를 기적의 날들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호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