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난처하고 창피한 일인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들이 우리의 기쁨와 공포를 이해할 가능성은 있다. 어쩌면 우리의 슬픔까지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느끼는 진정한 창피함은 항상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창피함이라는 감정이 유머와 마찬가지로 시대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 열살짜리 딸아이와 함께 아이가 다니는 학교 옆을 걸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 아이의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딸아이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멋진 남자아이들에게 그 창피한 광경을 들켰을까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무엇 때문에 창피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창피한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묻는다. 창피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 역시 시선을 피하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창피함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창피할 만큼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느니 차라리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아닌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는 자신들이 이룩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물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불쾌한 증거들을 후손에게 남긴다. 그러나 사회가 스스로 난처하고 창피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는 없다.
시간은 친절하게도 온 몸이 움츠러들 만큼 창피했던 기억조차 서서히 희미해져가도록 해준다. 미래의 사람들은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매우 창피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느꼈던 창피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창피함은 언제까지나 오로지 우리만의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6/blush-frazie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