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얼마 전에 프랑스의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20세기는 그래도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가장 열린 시대였고,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권이 신장된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지난 20세기 폐단 많아▼
사실 20세기에 인류는 갖가지 위기와 공포와 고통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삶의 조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개선된 시기였다.
하멜의 ‘표류기’에 보면, 1650년대 우리나라 인권상황은 지금의 북한의 그것보다 더 나빴으면 나빴지 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양반은 자신에게 불경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상민들을 사형(死刑)에 처할 수가 있었으니, 신관 사또는 자신의 수청을 들지 않는다고 춘향이를 처형대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20세기는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였다. 20세기 이전에는 흉년이 들 때마다 곳곳에 아사자들이 속출했고,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산림경제’ 구황편(救荒篇)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소생시킬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한 소상한 설명이 나와 있는 것만 보아도 당시에 아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는 건 짐작이 간다. 하멜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효종 때 이 나라를 덮친 대기근이 한두해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이 민족은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살아온 20세기는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였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20세기는 인류에게 커다란 걱정을 끼친 시대였다. 대규모의 전쟁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20세기 내내 인류는 갖가지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새로운 근심거리를 안겨 주었고, 계층간 혹은 지역간의 이기주의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20세기 말을 암울하게하는 것은 인류가 직면한 가치관의 일대 혼란이다.
사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모델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진지한 노력들이 있었다. 그리고 제국주의의 횡포로부터 민족자결권을 지켜야 한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와서 보면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가 하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공산주의는 망했고, 글로벌 경제체제 속에서 국가는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대에 이제 사람들이 믿는 것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돈이다. 대학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사람들은 온통 주식 거래에 몰입하고 있고, 기업인들은 기업인들 대로 대량소비만이 유일한 행복인 양 온갖 상품광고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업주의 극복해야▼
바야흐로 자유경제시장 원리라고 하는 상업주의가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정신이 실종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시대의 고민인 것이다.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인류는 모종의 불안에 떨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오랜 질병들이 극복되어 인간의 평균 수명은 현격히 늘어날 것이고, 유전공학의 발달로 식량은 전에 없이 풍족할 것이 분명한데 인류는 왜 벌써부터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작금의 상업주의가 새 시대의 인류 문명을 감당할 수 있는완전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직감하고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상업주의는 무책임한 데가 있었다. 돈만 벌면 되지,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자동차로 인하여 죽어간 인구가 핵폭탄이 터져 죽은 인구보다 훨씬 많을 테지만,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사람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21세기에 나타날 갖가지 과학기술들, 복제인간이라든가, 유전자 조작 농산물 따위에 벌써부터 인류가 불안해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그 무책임한 상업주의의 시녀로 이용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인류는 상업주의가 빚어 내는 갖가지 갈등 속에서 고통받게 될 것이다. 상업주의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사회체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