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초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규모 기업집단’ 리스트를 발표할 때면 중하위 재벌들은 숨을 죽인다. 30대 기업집단에 포함되는 순간 32개의 규제를 한꺼번에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때가 되면 한국전력 한국통신 포항제철 등이 부러워진다. 10대 재벌급 규모에 수시로 자회사를 설립하지만 공기업이란 이유로 규제를 전혀 받지 않기 때문. 6대 이하 재벌들은 “그룹 전체 자산이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1개 회사의 자산규모에도 못 미치는데 ‘5대’와 한묶음이 돼 규제를 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볼멘소리다. 규모가 커질수록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30대 이하 재벌 중엔 일부러 ‘축소경영’을 하는 곳이 적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26일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이제 그 명(命)을 다했다”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현정부의 재벌개혁으로 상호지급보증 관행이 사라지고 있고 기업지배구조도 혁명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게 ‘선고이유’.
한경연은 30대 기업집단 가운데 화의나 워크아웃이 진행중인 재벌이 많다는 현실적 이유도 들었다. 고합 한라 아남 해태 동아 등은 내년 발표하는 기업집단 리스트에서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한경연은 이 제도의 시행절차상 모순도 제기했다. 경제력 집중완화가 목적이어서 정부가 추진해온 빅딜과 배치된다는 것.
또 계열사간 내부거래와 채무보증 등을 계열사별로 규제하면서 △기업집단 지정 △결합재무제표 작성 등은 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것도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재계의 경영행태가 크게 변하고 시장개방도 이뤄진 만큼 집단규제를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