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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 낙태 정당한가?…美대학가 뜨거운 논란

입력 | 1999-12-27 19:59:00


‘동물해방’(1975)이라는 저서로 동물보호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호주 모나쉬대 피터 싱어교수. 실천윤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가 이번 학기에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강좌를 열자 대학이 떠들썩해졌다.

동물보호를 주장하는 한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장애아의 낙태를 역설해 왔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가 강의하는 건물 앞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최근 들어 시위가 진정 국면에 들어가자 경찰이 현수막과 바리케이드를 치웠지만 그의 주장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동물해방’과 ‘사회생물학과 윤리’등 그의 주요저서들이 번역출간됐다.

▽고통과 쾌락의 감수(感受)능력〓싱어교수는 70년대부터 유럽에서 동물보호운동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 그는 동물 역시 고통과 쾌락을 느낀다는 점을 근거로 동물 실험과 열악한 조건에서의 동물사육에 반대해 왔다. 실증적 사실을 근거로 한 그의 주장은 많은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홍빛의 연한 송아지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송아지에게 상상 못할 정도의 고통을 가해야 한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소와 격리돼 운동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안에서 철분이 최대한 억제된 먹이를 먹으며 16주 동안 빈혈에 시달리다가 ‘우아한’ 송아지요리가 돼 식탁에 오른다. 닭이나 돼지는 꼼짝달싹하기 힘든 우리에서 사육되고 쥐나 토끼는 실험실에서 온갖 약물을 투여받으며 죽어간다.

싱어교수에 따르면 ‘동물도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유정물(有情物)’이므로 그들을 좁은 우리에 가둬 기르거나 실험용으로 수술하고 약물을 투여하는 등의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존재’라는 그의 주장은 상당수의 공감을 얻었다.

▽‘행복의 총량’과 인간의 존엄성〓싱어교수는 ‘고통과 쾌락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개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수정된 지 28일이 안 됐다면 태아는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없고 자아인식도 못하므로 개체로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정후 28일 안되면 개체로 인정 어렵다"▼

물론 개체로 인정받기까지의 기간을 한 달로 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싱어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낙태의 합법화를 주장한다. 태어날 아이와 그 가족의 고통을 생각할 때 낙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행복의 총량’은 늘어난다는 주장이다.

▼"잉태되는 순간 인간" 장애아가족 항의시위▼

그의 낙태합법화 주장은 프린스턴대에 휠체어를 타고 나온 장애인과 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장애인들과 비판론자들은 ‘잉태되는 순간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는 것’이라며 그를 맹비난하고 있다.

▽종(種)차별주의에 반대〓싱어교수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여 인간에게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개체로 인정받는 기준은 ‘각 개체가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동물보호에 대한 사고방식에 혁신적 전환을 가져 왔다. 싱어교수가 이런 주장을 펼쳐 온 지는 25년이 넘는다. 새삼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아이비 리그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활동영역을 전세계로 넓힐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세계인을 상대로 그의 이론에 관해 검증을 받는 시험 무대일 수도 있다.

‘낙태론’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그의 이론에 따른다면 가축 사육장이나 동물 실험실에는 동물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쾌락을 최대한 증가시킬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그러면 축산업과 의학은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고 고기값이 급등해 많은 사람들은 싱어교수가 원하는 대로 자연스레 채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