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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흐르는 한자]斷袖(단수)

입력 | 1999-12-29 13:31:00


대체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옛날로 올라갈수록 남녀간의 성관계가 문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한중 양국에서 함께 볼 수 있는데 중국이 더 심했다. 춘추시대의 경우 아들이 아버지의 妾(첩)과 私通(사통)하는 烝淫(증음)이 있었는가 하면 아들의 배필을 아버지가 通淫(통음)하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서로 相對方의 아내를 交換하여 淫行하는 通室(통실)도 성행했다. 중국 秦始皇은 呂不韋(여불위)와 그의 애첩 趙姬(조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고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하나인 齊桓公(제환공)은 私娼街(사창가)를 설치해 세금을 징수

함으로써 중국 公娼(공창)의 시초가 됐다.

여자가 남자를 쾌락의 대상으로 삼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남북조 송 廢帝(폐제)의 누이동생 山陰公主(산음공주)는 무려 30명의 '面首(면수)'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美少年으로 채웠으며 당나라의 則天武后(측천무후)도 面首와 어울렸다.

그러니 同性戀愛(동성연애)인들 없었겠는가. 일부 蕩淫無道(황음무도)했던 군주들은 美童(미동)을 뒀는데 그들을 寵臣(총신) 또는 嬖(폐)라고 불렀다.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魏(위)왕은 미소년 龍陽君(용양군)과 동성연애를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부터 龍陽은 동성연애의 상징이 됐다. 漢武帝도 한언,李延年(이연년)도 동성연애 관계였다.

그 뿐인가. 서한 哀帝(애제·기원전 6∼기원전1)와 董賢(동현)의 同性戀愛는 가히 壓卷(압권)이다. 하루는 함께 침대에 누워있다가 董賢이 武帝의 옷소매를 베고 잠이 들고 말았다. 哀帝는 차마 그를 깨울 수가 없어 자신의 옷소매를 칼로 잘랐다. 이른바 '斷袖'의 고사로 '소매를 자른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 斷袖는 남자들의 동성연애를 상징하게 되었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mail.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