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진출 외국기업들이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반덤핑제도를 이용해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분쟁이 국내 건전지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미국 질레트와 싱가포르 에버레디사의 신경전.
국내 건전지 업체인 로케트전기와 서통은 올해 8월 미국 일본 싱가포르 중국 등 수입 건전지에 대한 반덤핑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무역위원회는 지난달 예비 조사에 착수한 상태.
신청서의 요지는 수입 건전지가 최근 3년간 저가 공세를 펼쳐 국내시장을 잠식하면서 국내업계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
국내 건전지시장은 싱가포르 에버레디 계열인 에너자이저가 올들어 약진을 거듭, 최근 40% 가까운 점유율로 1위를 독주하고 있다. 서통과 로케트는 20∼25%로 2,3위로 내려앉았고 듀라셀 영풍 등이 그 뒤를 쫓는 양상이다. 미국 듀라셀의 시장점유율은 3.8%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통과 로케트의 주요 타깃은 에너자이저라는 결론.
그러나 서통과 로케트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질레트의 계열사. 서통은 96년 듀라셀에 썬파워 브랜드의 상표권과 영업권을 양도했고 몇개월 후 듀라셀은 다시 질레트에 인수됐다. 로케트의 상표권도 지난해 질레트에 넘어갔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시장의 썬파워 로케트 듀라셀 등 3가지 브랜드는 모두 질레트 소유인 셈.
에너자이저측은 “반덤핑 제소의 배경에는 한국시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도 재미를 못본 질레트가 있다”면서 “우리가 한국시장에서 밀리면 질레트의 시장독점이 한층 심해져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국계 기업의 투자 진출이 늘면서 이같은 현상은 다른 업종에서도 흔히 발생하고 있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저가 공세를 막기 위해 마련된 반덤핑제도가 외국자본끼리의 한국시장 방어용으로 활용되는 셈.
독일계 한국아그파산업은 3월 일본 후지의 네덜란드산 PS인쇄판을 덤핑혐의로 제소했다. 무역위는 즉각 산업피해 조사에 들어갔고 후지측에서 값을 올리기로 결정, 양측이 합의한 상태.
한국아그파산업은 이에 앞서 일본산 수입품을 덤핑제소, 승소 판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본산 PS인쇄판에는 1월부터 3년간 24.51∼38.16%의 반덤핑 관세가 부과되고 있다.
프랑스 자본이 전체 지분의 98%를 확보한 한국베트로텍스는 지난해 미국과 일본 대만의 유리장섬유를 덤핑혐의로 제소했다. 무역위는 이들 3개국 유리장섬유에 대한 산업피해 조사를 벌여 올해 6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각각 10∼57%의 관세를 물리는 반덤핑 판정을 내린 상태.
무역위 이석영(李錫英)상임위원은 “반덤핑 제도는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오히려 불공정 거래를 막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면서 “외국계 기업도 국내에서 영업을 하고 있으면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홍석민기자〉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