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일시: 1999년 12월16일
▼대담장소: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장실
▽김학준 총장〓귀하는 클린턴 행정부 제1기 때 국방차관보로 일하면서 ‘나이 이니셔티브’로 알려진 미국의 적극적 대외정책을 입안해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새 세기를 맞아 세계정치 전반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해주겠습니까.
▽나이 원장〓20세기 말 미국은 세계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았습니다.하버드대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미국이 ‘외로운 초강대국’이 됐다는 표현을 쓰고,중국 학자들은 미국이 ‘유일한 일초(一超)’,즉 ‘하나뿐인 초강대국’이 됐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미국의 지위는 21세기에 들어가도 변함없을 겁니다.짧게 잡아도 앞으로 10년에서 15년까지,길게 보면 한 세대 동안 세계정치는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에 의해 크게 영향받을 것입니다.
▽김학준〓그같은 전망은 지나치게 미국중심적 역사관이 아닐까요.‘강대국들의 흥망’을 쓴 예일대의 폴 케네디 교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들의 몰락을 예견하지 않았습니까.물론 케네디 교수로 대표되는 디클라이니즘(declinism)적 역사관,즉 ‘몰락주의적 비관론’은 서방 강대국들의 병폐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만.
▼硬性국가서 軟性국가시대로▼
▽나이〓저는 그 점에 대해 이미 케네디 교수와 논쟁을 벌였습니다.그는 마치 대영제국이 자신의 경제력을 뛰어넘는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방비를 지나치게 지출하다가 쇠락의 길에 들어섰듯 미국 역시 비슷한 길을 밟고 있다고 보았는데, 저는 미국의 국방비 부담이 미국의 전반적 국력에 비해 감당할 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경성(硬性)국가(hard power)’와 ‘연성(軟性)국가(soft power)’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경성국가란 군사력과 경제력이 중심이 된 부국강병의 국가로, 20세기 후반까지는 이런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반면 연성국가란 학문과 사상과 예술이 중심이 된 문화국가인데, 21세기에는 이런 국가들이 세계를 이끌 겁니다.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지닌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를 지배하며,높은 수준의 문화가 낮은 수준의 문화로 흘러들어 그 나라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미국이 이미 연성국가로 성공적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확언합니다.미국은 21세기에도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일 겁니다. 그러나 학문과 사상,예술 등 ‘소프트’한 부분에서도 세계 1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이며,거기서 발생하는 압도적인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김학준〓문화와 문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뿐 우열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그러므로 중시해야 할 것은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상호 이해가 아닐까요. 이문화에 대한 상호 관용만이 헌팅턴 교수가 말하는‘문명들의 충돌’을 막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이〓전적으로 동의합니다.제가 문화라고 말했을 때는 과학과 기술을 포함한 학문,그리고 그 학문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달리 표현하자면 과학과 기술이 앞선 나라가 21세기에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뜻입니다.
▽김학준〓현재 미국이 과학에서 앞선 분야는,그리고 앞으로 앞서리라고 예상되는 분야는 어느 분야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이〓첫째는 정보통신 분야입니다.새로운 컴퓨터의 가격은 54년이래 매년 19%씩 떨어져 왔고,정보통신 기술에 대한 새로운 투자는 매년 7%로부터 50%로까지 상승해 왔습니다.정보통신 분야의 새 기술이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경제성장에 이바지한 몫은 무려 25%,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에 이바지한 몫은 8%에 이릅니다.마이크로프로세서들은 18∼24개월마다 컴퓨터 능력을 2배로 증가시켜 온 반면,그 가격은 70년에 비해 1% 이하로 내려왔습니다. 또 인터넷의 성장은 특별합니다.인터넷을 통한 정보유통은 매년 100%씩 늘고 있습니다.이것은 음성망을 통한 정보유통이 매년 겨우 10%이하씩 늘고 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둘째는 생명과학 또는 유전공학 분야입니다.사람마저 복제할 수 있다는 얘기,유전자(DNA)를 바꿔서 어떤 집안을 특이한 유전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얘기 따위는 이제 더이상 뉴스가 아닙니다.이제 바이오테크놀러지의 발달은 노화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 진행을 억제하는 데까지 와 있습니다.21세기에 들어서면 인간은 여러가지 많은 불치 난치병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20세기 말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21세기를 다 살고 22세기까지 보게 되리라는 과학자들의 장담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 두 분야에서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세계지도자적 지위는 확실해질 것입니다
▼제3의 산업혁명 진행중▼
▽김학준〓귀하의 지적대로 현재 인류역사에서 제3의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정보통신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이 제3의 혁명이 21세기 인류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나이〓우선 중앙정부의 약화 또는 비중앙집권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입니다. 20세기가 구심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원심력의 시대가 될 것이며,그래서 통치(governance)의 분산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공적(公的) 세계에서는,국내적으로 지방정부의 역할과 권한이 더욱 커지고 국제적으로 정부간(政府間) 조직들의 역할과 권한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사적(私的) 세계에서는,국내적으로 지방 기업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국제적으로 초국적 기업들의 역할이 더욱 중시될 것입니다.공적 세계도 사적 세계도 아닌 제3의 세계에서는,비정부조직(NGO)과 비영리조직(NPO)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는 계속해서 진행됩니다.물자와 사람 및 아이디어가 대규모로 빠르게 유통돼 지리적 거리를 줄이는 것을 저는 세계화라고 부르는데,세계화의 진행이 더욱 빨라지고 광범위해지면서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과 영역은 크게 제한될 것입니다.그리고 그 자리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시장(市場)이 차지하게 될텐데, 저는 이것을 마케타이제이션(marketization·시장화)이라고 부릅니다.
▽김학준〓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정부와 정치는 시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21세기에도 이런 경향은 그대로 유지될까요.
▼민주정치 형식 내용 바뀔 것▼
▽나이〓지적하신대로 우리 미국에서도 정부와 정치에 대한 신뢰는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미국의 경우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시하며 권위와 제도에 대한 존경심을 깎아내리는 후기산업사회의 가치관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그리고 중앙집권화와 예산증대에 대한 반발에 따라 그런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정치와 관료세계에서의 부정부패와 추문들도 불신을 증대시킵니다.저는 21세기에는 민주정치의 형식과 내용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가설에 긍정적입니다.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투표의 행태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김학준〓이제 21세기 동아시아 정세에 대해 토론해 보겠습니다.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면서,그리고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지난날의 동유럽공산국가들로까지 확대하고 일본과도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면서,그에 대한 반발로 지난날 같은 공산국가였고 군사동맹이던 러시아와 중국이 빠르게 접근하고 따라서 21세기에는 ‘러중 제휴체제’와 ‘미국 중심의 서방체제’사이에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냉전 가능성 희박▼
▽나이〓그런 비관적 전망에도 근거가 없지 않지만,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선 러시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대서양학파’의 목소리가 여전히 강합니다. 21세기 러시아의 장래는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얼마나 많은 지원을 받아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중국을 보면 21세기에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노선에 따라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계속 추진할텐데 그렇게 하려면 대외관계가 안정돼야 하며 특히 미국과는 동반자관계가 지속돼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중국의 지도층은 매우 실용주의적입니다.더구나 21세기에는 완전히 탈이념적이며 더욱 실용주의적인 지도층이 중국을 이끌어갈 것입니다.그들이‘새로운 냉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김학준〓북한의 장래,한반도 통일의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나이〓제가 정부의 국가정보협의회 의장으로 일할 때 김일성이 사망했습니다.그때 정부 안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은 북한이 몇해 안에 붕괴하리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그러나 그 예측은 잘못이었음이 증명됐습니다.북한은 내부통제의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여서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시대착오적인 스탈린주의 체제가 오래 존속하리라고 보지도 않습니다.더구나 국경을 무너뜨리는 정보화의 시대에 극단적 폐쇄체제는 변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렇게 볼 때 매우 조심스런 예측입니다만 2010년과 2015년 사이에 북한에서 본질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에 따른 남북관계의 변화는 아마도 한반도를 국가연합으로까지 바꿔놓으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조지프 나이는 누구?▼
△1937년 미국 뉴저지주 출생
△미국 국무차관보, 국방차관보,옥스퍼드대 객원교수 역임
△저서: ‘정보시대의 권력과 상호의존’등
조지프 나이는 프린스턴대 최우등 졸업, 로즈 스칼라로 옥스퍼드대 졸업, 하버드대 박사, 27세때 하버드대 교수 등의 경력에 보이듯 미국의 이른바 이스턴 이스태블리시먼트(동부의 기성질서)출신 가운데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학자다. 젊어서는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정치부패와 경제발전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했으나 차차 핵무기통제에 관심을 쏟으면서 국제평화의 정립을 위한 이론개발에 힘썼다. 그리하여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장에 발탁됐고, 이어 카터 행정부때 핵확산금지담당 국무차관보 및 국가안보회의 핵확산금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클린턴 행정부 1기때 국제안전담당 국방차관보 및 국가정보협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최근 그의 학문적 관심은 정보화 시대의 정부와 정치의 성격에 쏠려 있다. 정보화 혁명이 범지구적으로는 국가의 약화 현상을, 개별국가 안에서는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낳고 있다고 보는 그는 이러한 혁명적 변화기에 통치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놓고 씨름한다. 그렇기에 그의 정치학은 정보통신과학과 접목되어 가고 있다. ‘포린 폴리시(외교정책)’, ‘인터내셔널 시큐리티(국제안전)’ 등 전문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