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존중하면서 미래를 상상한다.’ 미국의 밀레니엄 구호다. 새 천년의 창조 화합 번영을 위해서 20세기가 남긴 영광스러운 유산은 보존하고 부끄러운 유산은 청산하자는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의 새 천년 설계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우리 정치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지난 세기에 우리 정치는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민주화를 이룩한 위업을 달성했지만 해묵은 지역주의 붕당정치 대결정치 부정부패를 청산하지 못한 채 21세기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새 천년에 새 정치를 설계하기 위해서 먼저 지난 세기의 우리 정치가 걸어온 영욕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를 해명하는데 우리는 소중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 민주화 투쟁, 민주주의의 건설이라는 지난 20년간의 정치적 격동기를 주도해 온 네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아직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21세기 한국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지난 세기에 우리 정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솔직하게 말해줌으로써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창조해 나가기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전직 대통령들 중 처음으로 김영삼전대통령이 이 달 중순에 회고록을 출간한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아서 완전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회고록의 주요 내용은 1993년 집권하기 전까지 자신의 정치입문, 반독재투쟁, 김대중대통령과의 협력, 경쟁, 결별 과정을 직설적 화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회고록에서 김전대통령은 자신의 민주화 투쟁을 부각시키면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신랄한 독설과 비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회고록에 담을 내용은 김전대통령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회고록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
김전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해서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지도자 (statesman)가 아니라 당파적 정치가(politician)의 회고록이라는 점이다. 김전대통령은 한국 민주화를 이끌어 온 두 거인 중의 한 분이다. 우리는 회고록에서 거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그 거인이 어떻게 정치에 입문하여 독재에 대한 투쟁을 이끌고 민주화를 설계하고 이끌어 왔는지를 보고 싶었다. 우리는 또한 그 과정에서 개인적 정치적 욕심과 당파적 이해 때문에 민주화의 계기를 놓치는데도 기여한 ‘인간 김영삼’의 한계와 책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 한국 정치의 축소판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 세기로 이월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지혜를 찾고 싶었다. 그런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회고록은 ‘네 탓이오’로 일관하면서 전현직 정치지도자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인정하는 ‘내 탓이오’는 없다고 한다.
둘째로 ‘회고록의 정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전직 대통령이 회고록을 출간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그 시기가 묘하게도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오해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회고록은 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담은 회고록의 출간이 총선에서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대결의 정치를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새 천년의 화두는 공존과 화합의 정치이다. 19세기의 시대정신이 자유, 20세기의 시대정신이 평등이라면, 21세기의 시대정신은 박애이다. 세계화, 지식정보화혁명으로 국경을 넘어선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존중하고 끌어안는 관용과 포용력의 정치가 요구되는 것이다. 새 천년의 아침에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 출간이 역설적으로 불화와 반목의 정치를 청산하고 화해와 화합의 정치를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임혁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