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뭉칫돈이 증권금융채권 등 일부 무기명 장기채권으로 대거 몰리면서 해당채권 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무기명 채권은 보유자에 대해 자금출처를 묻지 않으며 상속세 증여세가 면제된다. 채권시장 관계자들은 일부 부유층과 사채업자들이 내년부터 다시 실시되는 금융소득 종합과세에 대비해 일찌감치 사재기에 나선데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돈세탁 수요가 가세하면서 무기명채권 품귀현상이 생긴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제논리가 무시된 무기명채권 거래〓9일 금융계에 따르면 98년말 5년 만기로 발행된 액면가 1000만원짜리 증권금융채권이 올들어 1500만원선에 거래되고 있다.
투신 구조조정 재원마련 등을 위해 총 2조원 어치가 발행된 이 채권은 △1000만원 △1억원 △10억원 등 세 종류가 있으며 표면금리는 연 6.5%. 1000만원짜리를 만기일인 2003년말까지 갖고 있으면 1370만원을 돌려받으므로 지금 1500만원에 매입할 경우 채권수익률은 대략 연 -2%가 된다. 채권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국내 금융 시장 사상 처음.
4년 뒤 1370만원을 받기 위해 1500만원을 투자하는 비상식적인 주문이 쇄도하고 있지만 그나마 물건이 없어 실제 거래는 뚝 끊긴 상태. 채권 딜러 A씨는 “주로 서울 강남지역 증권사 지점에 5억∼20억원 단위로 사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고 있지만 팔려는 사람이 없어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
▽어떤 돈이 몰리나〓증금채는 돈 가뭄이 극심하던 시기에 발행됐고 수익률도 시중금리보다 턱없이 낮아 개인이 매입을 꺼리는 바람에 1조원어치 이상을 투신 등 금융기관들이 마지못해 떠맡았다.
증금채 값이 치솟은 것은 투신 환매와 주가상승 등의 영향으로 시중 부동자금이 급증한 작년 연말부터. 전문가들은 외환위기 직후의 고금리와 주가상승을 통해 재산을 불린 부유층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수단으로 무기명 채권을 택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다시 실시되더라도 만기 5년 이상 채권의 이자는 분리과세 대상이라는 점도 증금채 인기를 높이는 요인. 이 채권의 상품성에 주목한 서울 명동의 사채업자들이 매입경쟁에 뛰어들면서 연 4%를 유지하던 채권수익률은 12월 하순경 연 0.5%로 떨어졌다.
무기명 채권으로는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과 근로자고용안정채권 등이 있지만 이들 채권은 개인보유 물량이 대부분이어서 거래가 활발하지 않다.
한 사채업자는 “개인보유 채권은 위변조 염려 때문에 거래가 뜸하고 투신 등 금융기관 매물을 선호하는 분위기”라며 “새해 들어 정치권으로 보이는 곳에서 증금채를 구입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