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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오래된 정원(322)

입력 | 2000-01-12 19:02:00


그게 아닌 거 같애. 들어오면서부터 완전히 저기압이었어.

내가 침실 문을 살그머니 열어 보았더니 영수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더군요.

들어가두 돼?

예에, 일 없시오.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 맞은편에 앉으면서 얼핏 보니 영수가 눈가를 얼른 훔치면서 외면을 해요. 그리곤 베개 아래로 뭔가 감추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 것도 아니야요.

그건 뭐야, 이리 좀 줘 봐.

사진이야요 머….

어디 좀 보여 줘.

그가 머뭇거리면서 내미는 작은 사진을 채뜨려서 보았지요.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을 배경으로 다섯 명이 나란히 서있는 흑백의 가족 사진이었어요. 목까지 단추를 잠그게 되어 있는 닫힌 옷을 입은 남자가 아버지, 그리고 한복을 입고 머리를 뽀글뽀글 파마한 여자가 어머니, 그들 가운데 흰 셔츠와 반바지에 목에는 소년단 머플러를 두른 인민학교 어린이가 얼굴 윤곽으로 보아 영수가 분명하겠고, 옆에 나란히 서있는 중학생 교복의 소녀들이 누나들이었을 거예요. 내가 말했죠.

가족 사진을 보구 있었구나. 여기가 어디니?

대동강변에 소풍 나가서 박은 사진이야요.

나는 영수에게 사진을 돌려 주었습니다. 사진을 받으면서 영수가 그랬어요.

저어… 래일 돌아갈라구요.

잘 생각했어.

오늘 나갔다가 학교 기숙사로 전화 했댔시오.

누구한테….

같이 류학 나온 동무한테 전화했시오. 돌아오기만 하문 아직 괜찮다구 날래 돌아오라구 기래요.

잘못이 있으면 벌두 받구 하겠지만, 솔직하게 얘기하구 떳떳하게 사는 게 좋을거야.

저두 기렇게 생각해요.

나가서 밥 먹자.

내가 영수를 데리고 거실로 나오자 이 선생은 벌써 식탁에 저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말했어요.

영수 학생 내일 돌아간대요.

어 그래? 우리가 바래다 줘야겠구나.

그러곤 세 사람 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별로 할 말이 없었지요. 내가 식탁을 치우고 차를 내고 둘은 차를 마시고 앉았더니 영수가 이 선생에게 말했어요.

여기서 망명을 하면 어떻게 되나요?

글쎄, 먼저 변호사를 만나구 당국에 자진신고 해야겠지. 심사를 받은 뒤에는 일정 기간 망명자 수용소에서 지내야 할걸. 자넨 독일 말을 어느 정도 하니까 곧 취업을 할테구… 그렇게 되지 뭐.

여기서 사는 것도 막막해요. 독일 사람들두 제각기 쓸쓸하게 살던 걸요.

모두 자기 개인의 책임이니까.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냐?

정신없이 일하구 돈 벌구 물건 사구….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함께 근처의 할인점에 가서 영수에게 몇 가지 선물을 사주었습니다. 나는 영국 상표가 붙은 모직 머플러와 장갑을 샀고 이 선생은 신발을 골랐어요. 영수는 그 자리에서 머플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신발을 바꿔 신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