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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미스터]설원의 자유주의자 '스노보더'

입력 | 2000-01-16 20:04:00


함진우씨(26)의 ‘컬러’는 블루다. 푸른색 귀고리에 파란 렌즈의 눈과 청색 보드복….

그는 1996년 겨울, 우연한 기회로 타게 된 스노보드 때문에 지난해 11월 6년간의 공군생활도 미련없이 접었다. 퇴직 후 맨 먼저 한 일은 강원 평창군의 한 스노필드를 찾은 것. 10명의 ‘동지’를 수소문해 월세 60만원의 민박집을 구했다. 배고플 땐 곧잘 주머니에 찔러넣어둔 쵸코파이로 속을 달래지만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

▼왜 스노보드인가▼

대한스노보드협회 선주훈이사에 따르면 스노보드가 89년 국내첫선을 보인 이래 보더의 인구는 97∼98시즌 5만명, 98∼99시즌 7만명, 99∼2000시즌 15만명으로 급격한 증가세. 같은 겨울 스포츠인 스키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다. 10대후반부터 20대 연령이 절반이 넘으며 30대가 그 다음.

선씨는 “‘삐딱하게’ 선 채로 옆바람을 맞을 땐 엄청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며 “특히 스키처럼 자세나 복장이 정형화되지 않아 자유로운 게 보드에 ‘중독’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정신분석가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하는 인간은 신화 속의 ‘이카로스’처럼 누구나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며 “하늘을 날며 일탈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어 스노보드에 쉽게 빠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인 더글러스 러시코프가 저서 ‘카오스의 아이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스노보더가 지닌 비(非)선형성과 멀티 태스킹(Multi-Tasking)의 속성은 카오스적인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주요 능력이 아닐까.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을 통해 21세기초 세상 흐름을 살펴보면….

▼선형적(연속적)인 삶은 싫다▼

정돈된 자세로 장애물을 절묘하게 피하면서 슬로프를 내려오는 스키어와 달리 스노보더는 의도적으로 위험한 곳을 택해 틈새를 뛰어넘고(Gap Jumping) 이곳저곳을 누비며 성취감을 느낀다.

공군사관생도 출신으로 스노보드 마니아인 이경식씨(28·서울 강남구 역삼동)는 1년 전 군을 떠났다. 정해진 길을 걷는 대신 전문경영자가 되는 것이 유망하다고 판단, 우선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러시코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불연속성과 변화를 거부하지만 ‘카오스의 아이들’은 이 불연속성을 받아들여 새 문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고 한 것처럼.

▼동시에 여러 일을 한다▼

영화사 월트디즈니의 마케팅 이사인 김창곤씨(43)의 직업은 두 가지다. 지난해 극단 ‘떼아뜨르 노리’의 단원이 되면서 연극 ‘유리가면’과 ‘네오 로미오와 줄리엣’에 데뷔했다.

연극 입문엔 스노보드 동호인들의 영향이 컸다.

“생각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보더들은 20대엔 이런 일을, 30대엔 저런 일을, 40대엔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폼이나 스타일이 정해져 있는 스키에 비해 스노보드는 점프하거나 하프파이프(반으로 자른 원통모양 위에서 묘기부리는 것)에서 탈 수도 있다. 또 폴대가 없으니 두 손이 자유로워 고구마도 먹을 수 있다. 한 우물만 판다는 건 보더의 사전에 없다.

▼자유롭고 열린 세상▼

남궁경희씨(29·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는 보더복이 자유롭고 ‘중성적’이어서 좋다.

“스키탈 땐 몸에 꽉끼는 바지에, 완전히 ‘공주’ 복장이었거든요. 보드복을 입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보드화도 신을 수 있고 장비도 가벼워서 덜 번거로워요.”

프로보더인 김현식씨(32)는 “스키가 ‘사장님’의 스포츠로 시작했다면 스노보드의 시작은 서핑 스케이트보드 등 힙합문화가 근저에 깔린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있어 누구에게나 개방적”이라고 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많아 새로운 것을 두려움없이 받아들이는 스노보더들이 21세기 속을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larosa@donga.com